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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황필상 법' 남기고 떠난 '사람 농사꾼'

입력 2019-01-1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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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황필상 법' 남기고 떠난 '사람 농사꾼'

"구원장학재단 황필상씨 사진 관련해 연락드립니다."
지난달 30일 오전 한 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2016년 제가 쓴 기사에 사용한 사진 원본을 받을 수 있는지 정중하게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활짝 웃고 계신 사진', '가족으로서 너무 귀한 사진', '건강이 안좋아지셨는데…'. 영정 사진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이 되면서, 황씨의 사진을 찍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생생하게.

황필상 구원장학재단 이사장.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겪은 일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평생 모은 195억원을 장학재단에 기부했다가 140억원의 '세금 폭탄'을 맞았고, 못받아들이겠다고 길고 긴 소송을 치르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황 이사장은 1947년 서울 청계천 인근 판자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생활정보지 수원교차로를 설립해 자수성가하자 '사람 농사'를 짓고 싶었다고 합니다.
2002년 모교인 아주대에 기부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수원교차로 주식 지분 90%(당시 평가액 180억원)와 현금 15억원을요.

아주대 측이 직접 증여를 받는 건 곤란하다고 해서 대학과 공동으로 '황필상 아주 장학재단(현 구원장학재단)'을 세웠습니다. 2008년까지 6년 동안 학생 733명이 41억원이 넘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무서에서 세금 140억원을 내라고 했습니다. 100억원의 증여세와 5년 동안 내지 않은 가산세 40억원을 합친 겁니다. 장학재단에 재산을 기부한 건 편법으로 상속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본 거죠. 장학재단의 재산과 계좌가 압류됐습니다.

황 이사장은 이듬해 세금 부과를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2010년 1심에서 이기자 "이제 다 해결됐다" 싶었다는군요. 하지만 이듬해 2심에서 "경제력을 가족 등에게 승계할 위험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세무서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제가 황 이사장을 만난 건 그로부터 6년 뒤, 대법원 판결이 나오던 날이었습니다.

 
[취재설명서] '황필상 법' 남기고 떠난 '사람 농사꾼'


2017년 4월 20일 오후, 대법원 법정에서 저는 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원심을 파기하고…" 8년 동안의 긴 소송에서 이기는 순간, 그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가 곧 내려왔습니다. 담담한 얼굴이었습니다.

선고 뒤 기자 회견에서 질문이 쏟아질 때도 "더 이상 앞길이 안 보일 때 나에게 큰 힘이 돼 준 '의인들'"이라며 변호인단을 치켜세울 뿐이었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를 쫓아갔습니다. 법원 안 흡연 구역.담배 연기를 한 모금 뱉으며 그는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너무 오래 걸렸어. 이번 일로 400살 도사가 된 것 같아."

그의 미소가 사라지기 전에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서 사진을 급히 찍었습니다.
 
[취재설명서] '황필상 법' 남기고 떠난 '사람 농사꾼'



그가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처음엔 속 무지하게 많이 썩었어. 내가 왜 기부를 해서 범죄자로 몰리고 가족들에게도 미안해서 후회를 많이 했어. 그 뒤론 체념했지. 이 일에만 몰두하면 죽을까 봐. 내가 만학도로 돈도 없이 공부할 때 배운 노하우가 있지. 힘들수록 힘을 빼고 버티는 거야."

그는 아직도 사람 농사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많이 길러 외국에 유학도 보내고 씨를 잘 뿌리고 있었는데…"하고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차를 타고 떠나기 전 그가 말했습니다.

"이제 500살 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열심히 키워보리다."
황 이사장의 가족들이 찾는 건 바로 그날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이메일로 사진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아침, 답이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쓸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루에 2만보씩 걸을 정도로 건강했던 고인은 소송을 치르면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합니다.

2017년 12월 국회에선 선의의 기부자가 세금 걱정 없이 주식을 사회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는 일명 '황필상법'(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통과됐습니다. 법정 투쟁으로 사람농사의 씨 뿌리기를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지만,남들은 사람농사를 짓기 쉽도록 토양을 다지고 간 겁니다.

고인은 아주대의료원에 자신의 주검을 기증하고 떠났습니다. 마지막 나눔이었습니다.

출근을 하려고 샤워를 하다가 왈칵 울음이 났습니다. '500살까지' 사람농사를 짓겠다던 분이 이렇게 허망하게 가시다니 속이 상했습니다.

2018년의 마지막 날, 퇴근길에 그의 빈소를 찾았습니다. '아, 정말 내가 찍은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걸려있구나.' 담배 연기 속에서 웃고 있는 그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취재설명서] '황필상 법' 남기고 떠난 '사람 농사꾼'



"그 양반 그래도 이겨서 후회는 없이 갔어 정말로."
사모님께서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고인께서 제가 쓴 기사를 읽고 또 읽고, 복사해서 주변에 나눠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자서전은 다 쓰셨나요?"
제 물음에 유족들은 의아한 표정이었습니다.

고인의 사진을 찍은 날 그는 "두 딸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가족들 모르게 자서전을 쓸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몰래 준비하는 아버지처럼 들뜬 표정이었습니다.

두 따님은 울음과 웃음이 섞인 얼굴로 "어서 아버지 노트북을 열어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또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고인의 따님이었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서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영결식에서 아버지 유서로 모두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유족의 허락을 받고 고인의 뜻을 몇줄 함께 나눠봅니다.

"주어진 일에 감사하면서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여력이 있거든 인정을 베풀어라! 남을 위해서도 살아라! 내 이웃이여! 사랑합시다. 줍시다. 100년 인생도 순간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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