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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드러난 일본 근로정신대 처참한 실상

입력 2013-10-04 18:22

"배고픔·공습 공포·매질 악몽 선명해"

'일본군 위안부' 오해로 가족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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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공습 공포·매질 악몽 선명해"

'일본군 위안부' 오해로 가족 파탄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던 일제 강점기의 처참했던 고통은 68년이 지나고도 생생했다.

4일 오후 2시 광주지법 제12민사부(부장판사 이종광) 심리로 일제 강점기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열린 204호 법정.

전범기업인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나선 양금덕(82·여) 할머니가 68년만에 한국 법정에 섰다.

침착하게 증인석에 선 양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처참하게 짓밟았던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실상을 낱낱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좀먹고 육체까지 병들게 한 고통은 눈 앞에 선명했다. 양 할머니는 전남 나주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던 1944년 5월30일 부모님 몰래 나주역에서 기차에 올라탔다.

14살 철없던 양 할머니는 부유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일본에 가면 중학교도 보내주고 돈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일본 헌병과 일본인 교장의 말이 솔깃했다.

하지만 "일본에 가는 것은 전쟁때문이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일본행을 포기했으나 "간다고 했다가 안가면 경찰이 부모님을 잡아 가둔다"는 교장의 협박이 어린 마음에는 더 크게 다가왔다.

결국 부모님 몰래 학교에 도장을 가져다 줬고 양 할머니의 인생은 그렇게 부숴지기 시작했다.

여수에서 탑승해 밤새 물길을 가르던 배는 양 할머니를 포함해 전남 지역에서 동원한 어린 학생 등 138명을 일본 시모노세키 항구에 내려놓았다.

낯선 일본 땅에서 두려움에 떨며 다시 열차를 타고 얼마나 지났을까, 일본 야욕의 선봉에 설 비행기를 만드는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이 시선에 들어왔다.

공장에서의 생활은 어린 소녀를 하루하루 고통과 공포에 떨게 만들었고 처우는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 그 자체였다. 비행기 외부에 칠했던 맹독성 페인트는 어린 소녀의 눈과 코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배고픔과 새벽잠을 깨우던 공습, 이어지는 매질은 가녀린 소녀들을 떨게 만들었다.

일본인은 쌀밥에 여러 반찬을 먹었지만 조선의 어린 소녀들은 감자밥에 매실장아찌 2알, 단무지 2개, 된장국이 전부였다.

그리고 일본인이 먹다 버린 잔반통을 뒤졌다고, 일을 못한다고, 화장실에 늦게 다녀 왔다고 가혹한 군홧발이 앙상한 소녀들의 몸을 짓밟았다.

하룻 밤에 2~4번 가량 이어지는 공습으로 인해 불면의 나날이 이어졌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방공호에 서로 들어가려고 아비규환이 일어났다.

지진의 후유증은 아직도 양 할머니의 육체를 좀먹고 있다. 당시 지진이 뭔지 몰라 허둥대던 양 할머니는 미처 대피하지 못해 무너진 공장 잔해에 깔려 철근이 옆구리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치료는 고작 식당에서 얻은 된장을 바르는 게 전부였다. 지진으로 한국에서 온 동료 6명이 사망했다.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에 돌아올 때만 해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지금까지의 임금을 조선의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집에 돌아왔으나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천형' 같은 굴레가 덧씌워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근로정신대를 일본군 위안부로 오인해 손가락질 한 것이다.

양 할머니의 집은 마을 속 외딴 섬이 됐고 아버지도 홧병으로 돌아가셨다. 외지로 출가한 언니의 도움으로 21세에 선을 봐 결혼했으나 10년만에 남편이 일본에 갔다온 사실을 알고 집을 나갔다.

남편은 다시 10년만에 병든 몸으로 밖에서 낳은 아들 셋과 함께 나타났지만 투병 끝에 1년 뒤 저세상으로 갔다.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광주로 이사 온 양 할머니는 대야에 생선을 담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판매해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평화도 잠시, 1980년대 일본과의 소송이 시작되면서 다시 따가운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일본에 간 여자는 모두 위안부라는 잘못된 인식이 여태껏 이어지고 있었다. 양 할머니는 밤에만 집 밖을 나가며 다시 숨을 죽이고 살기 시작했다.

25년이 걸린 일본과의 소송은 패소했고 미쓰비시중공업과의 17차례에 걸친 협상도 결렬됐다. 단 일본은 당시 근로자임을 인정해 후생연금 99엔(한국돈 1300원 가량)을 주겠다고 했다. 양 할머니 등 피해자들은 99엔을 일본 대사관 앞에 뿌렸다.

양 할머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광주에서 발족하면서 다시 힘을 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일본의 사죄를 받아야만 저 세상에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 할머니는 이날 법정에서 "목에 걸어 놓은 열쇠는 잊어버리지만 끔찍했던 일본 생활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일본의 사죄만 받아도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또 양 할머니는 "손해배상금을 받는다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 한포대씩이라도 돕고 싶다"며 "무엇보다 부모님 묘에 비석을 세우고 술 한잔 드리고 이제서야 못받은 돈 받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서운함도 표현했다. 양 할머니는 "소송을 지원하는 일본 사람들은 '한국 정부가 왜 가만히 있느냐'고 한다"며 "박정희 정부가 일본의 돈을 받아다 쓴 만큼 딸인 박근혜 정부가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의 한을 풀어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미쓰비시중공업 측 변호인은 반대 심문을 하지 않았다.

이날 양 할머니를 포함해 이동련(83·여)·박해옥(83·여)·김성주(84·여) 피해 할머니와 부인과 동생을 대신해 소송에 나선 김중곤(89) 할아버지도 증인 심문을 통해 피해 실상을 진술했다.

양 할머니 등 원고 5명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1인당 2억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재판에는 광주시민과 학생은 물론 일본에서 10년 넘게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지원활동을 펼쳐 온 일본 지원단체 관계자 12명도 참석했으며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재판 시작에 앞서 언론의 촬영을 허가했다.

선고공판은 11월1일 오후 2시 204호 법정에서 열린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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