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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53년만에 공개된 중앙정보부 자료 '15글자'

입력 2021-04-09 16:06 수정 2021-04-09 18:04

민변 정보공개청구소송 3년 8개월만…여전히 진행 중인'진상규명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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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정보공개청구소송 3년 8개월만…여전히 진행 중인'진상규명 싸움'

퐁니·퐁넛마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초혼제. (사진=한베평화재단)퐁니·퐁넛마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초혼제. (사진=한베평화재단)

지난 4일,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에서는 초혼제가 열렸습니다. 1968년 마을에 들이닥친 한국군 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것입니다.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에 이들이 더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이유는, 아직 제대로 진상 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는 당시 학살이 있었는지 진상조사에도 나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과나 배상 절차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 [취재설명서]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5년째 한국 찾는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
(2020년 10월 16일, https://mnews.jtbc.joins.com/News/Article.aspx?news_id=NB11974004)

다만 당시 분명히 민간인 학살이 있었고, 우리 정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실마리가 하나 있습니다. 참전군인들 중 일부가 전쟁 후인 1969년에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냈던 군인들은 고 최영언 중위(당시 해병 포항 상륙전 기지사령부 훈련 교장 관리대 사격장 보좌관), 이상우 중위 (당시 경남 진해 해병학교 구대장), 고 김기동 중위 (당시 포항 파월특수 교육대 근무)입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임재성 변호사는 해당 자료가 현재 국정원에 있을 것으로 보고 정보공개청구에 나섰습니다. 국정원이 거부하자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1969년 조사 당시의 원본은 없더라도, 1972년 중앙정보부에서 마이크로필름화 작업을 했기 때문에 국정원에 자료가 남아있으리라 본 겁니다. 다만 해당 조서를 특정할 구체적인 정보가 없으니, 일단 '당시 마이크로필름화로 작업한 조서 목록'을 달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게 2017년 11월입니다.

그로부터 3년 8개월 정도가 지나서 지난 6일 해당 목록이 공개됐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렸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소송 1심과 2심에서 국정원이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고 이 결과가 확정됐는데도 국정원이 또다시 거부했습니다. 거부 사유를 바꿔 다시 또 정보를 주지 않은 것인데요. 두 번째 소송은 대법원까지 가서 지난달 확정됐습니다. 역시 공개하라는 결론이 나오자 국정원은 아래 사진과 같은 문서를 보냈습니다.
 
국정원이 공개한 당시 문서 목록.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제공.국정원이 공개한 당시 문서 목록.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제공.

앞서 말씀드린 군인들의 이름과 지역이 적혀 있는 불과 열다섯 글자의 문서입니다. 외교적 국익에 해가 된다는 이유, 혹은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4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끌어 감추고 있던 문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국정원은 이 정보공개 건에 대해서 'NCND(Neither Confirm Nor Deny)'의 기조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 등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어떤 합의가 없는 상황인 만큼, 중앙정보부가 당시 이들을 조사했는지에 대해선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생각해보면 이 15글자의 문서에 담긴 의미 역시 크다는 뜻이 되지요. 당시 학살 사건을 우리 정부가 인지해서 군인들을 조사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이 된 셈입니다.

여전히 과제가 남았습니다. 민변 임재성 변호사, 김남주 변호사 등 베트남 TF 소속 변호사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 빈칸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빈칸'은 현재 진행 중인 손해배상청구소송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지난해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 응우옌티탄 아주머니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는데요. 다음 주 월요일(12일)에 재판이 열립니다. 응우옌티탄 아주머니 측 요청으로 담당 재판부는 국정원이 조사 자료 일체를 재판부에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응할지는 미지수입니다. 혹시 응하지 않는다면 변호인단은 정보공개청구소송을 통해 '빈칸'을 메워가겠다는 입장입니다.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퐁니·퐁넛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사진=김준택 영상취재기자 (캡처)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퐁니·퐁넛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사진=김준택 영상취재기자 (캡처)

오늘(9일) 민변이 연 기자회견에 화상으로 참석한 응우옌티탄 아주머니는 국정원이 모든 정보 목록을 공개해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또 진상 규명 요청을 외면하는 한국 정부에게도 책임을 물었습니다. 적어도 이번 정부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8년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언급만 했습니다. 국가배상청구소송에서도 정부는 "한국군이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교전 중에 발생한 사고라 위법성이 없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이 의도적인 살상을 했다는 직·간접 증거들은 남아 있습니다.
결국 아직 이들을 달래주는 건 시민사회의 손길뿐입니다. 한베평화재단 등이 모의재판인 '시민평화 법정'을 열어 한국 정부를 피고석에 앉혀 국가 책임을 묻고, 청와대에 청원도 제출했습니다. 여전히 응우옌티탄 아주머니는 당시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짓지만, 또 언제든지 따뜻한 화해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한국군이 아닌 '일부' 한국군이 학살에 가담했다는 언급도 빼놓지 않습니다. 가족을 잃고 자신도 상처를 입는 상처를 입었지만, 먼저 우리 정부에게 용서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진상규명'과 '사과 한마디'만을 바라며 몇십년을 버텨온 아주머니의 삶이 이제는 좀 편안해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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