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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실명_미투 #익명_보도

입력 2018-03-14 13:39 수정 2018-03-1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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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실명_미투 #익명_보도

▶국회 첫 실명 미투

지난 5일 대한민국 국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자신의 이름을 밝힌 5급 비서관 정모씨가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는 글을 올렸다. 국회에서 나온 첫 실명 미투였다.

가해자로 지목된 건 2012년부터 함께 근무한 4급 선임보좌관이었다. "친동생 같다며 엉덩이를 만지고 입맞춤을 강요했다"고 정씨는 기술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날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날 뉴스룸을 통해 보도했다.
 

뉴스룸 기사에 그는 '정모씨'로 표기됐다. 그리고 지금 나는 취재 후기를 쓰며 그를 '익명' 표기하고 있다. 최초의 실명 미투 주인공인 그는 어떻게 익명의 폭로자가 된 걸까. 이번 취재설명서는 바로 이에 대한 설명이다.

 ▶'실명 미투'가 '익명 보도'로

정씨가 실명 폭로를 한 건, 후배들에게 "당당하게 맞서라"고 말하고 싶어서 였다. 국회 내에서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왔고, 또한 목격해왔던 정씨는 후배들이 고충을 털어놓으면 "맞서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3년간 꾹꾹 눌러 참아 왔다. 그러다 결국 2015년 자기 발로 의원실을 떠나야 했다.

서지현 검사 폭로 이후 거세게 일어나는 미투를 보며, 그럼에도 꿈쩍 않는 국회 상황을 보며, 비겁하게 도망쳤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자기 이름 석자를 게시판에 올렸다.

하지만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가자 정씨는 "실명은 쓰지 말아달라", "얼굴을 정면으로 찍는 건 좀 그렇다"고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국회 게시판에 실명을 쓴 건, 그만큼 진정성을 보여줘야겠단 생각이었지만, TV 화면을 통해 제 이름과 얼굴이 나가면 부모님이 많이 힘들어 하실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과거 성추행에 시달리다 의원실을 그만둘 때도 부모님에게 건강 때문이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실명 폭로'는 이렇게 '익명 보도'가 됐다. 그에게 이유를 더 따져 묻진 않았다.

▶피라미드 구조…4급 93.3% 남성

국회의원실엔 보통 9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한다. 4급 보좌관 2명, 5급 보좌관 2명, 6·7·8·9급 각 1명, 인턴 1명 등이다. 의원 한명이 각각 독립된 입법 기관이듯 의원실도 독립돼 있다. 한 사무실엔 소수가 근무하고, 검사 조직만큼이나 위계가 분명하다.

"피라미드형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채용과 인사에서 선임 보좌관의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작은 바닥이라 평판이 채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죠."

여성이 그 피라미드 구조의 바닥을 형성하고 있다. 4급 보좌관의 93.3%가 남성이다. 100명 중 6명만 여성이란 얘기다. 반면 8급은 62.2%가 여성이다. 9급은 66%다. 사실상 인사권을 쥔 선임 보좌관은 대부분 남자고, 이들의 평판에 절대적으로 기댄 하급직엔 여자가 다수다. 이렇게 형성된 오래된 권력 관계로 인해 국회 내 성폭력이 만연해 있음에도 저항이나 폭로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게 정씨의 진단이었다.

"항의를 했는데, 가해자(상급자)가 멈추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거예요. 제가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건 사무실을 나가겠다는 것과 같고, 그건 생계의 문제가 생긴다는 거잖아요."

생계의 문제. 그 지점에서 정씨가 다 하지 못한 '머뭇거림의 이유'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의 폭로로 3년간 그를 괴롭힌 선임 보좌관은 바로 면직 처리됐다. 미투의 바람 속에 가해자 이름이 거론되자, 보좌관이 속해 있던 의원실의 국회의원은 그를 바로 잘랐다.

당시 이 문제를 취재하며 이런 말을 들었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폭로했다고 하더라도, 그도 먹고 살기 위해선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 '조직과 동료에 폐를 끼치는 사람'으로 규정되고 싶진 않았을 겁니다. 너도 누구처럼 인생을 걸고 싸우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정씨는 충분히 용기 있었고,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익명으로 라도 보도할 수 있었던 건 내게 행운이었던 거다.

 ▶정치권 미투 폭풍, 그러나

 정씨와의 인터뷰 보도 뒤, 정치권엔 미투 폭풍이 몰아쳤다.

정씨 폭로와 같은 날 보도됐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로부터 촉발된 바람이 정치권을 뒤덮었다. 광역단체장 후보, 전직 의원, 그리고 현직 의원까지 예외가 없었다. 3월 8일 여성의날 행사엔 여야 지도부가 총출동했다. 모두가 미투를 지지했고, 성폭력을 행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야의 최고위원회의, 의원총회, 그리고 국회 기자회견장(정론관)은 3월 내내 '미투' 관련 발언과 논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정씨와 같은 여성 보좌진은 또 잊혀졌다. 국회는 시끄러웠지만 의원 사무실이 있는 회관은 잠잠했다. 회관에서 만난 한 남성 4급 선임 보좌관이 이런 말을 했다.

"5월이면 20대 국회 전반기가 끝나죠. 6월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가 마무리된 올 여름은 국회 채용기간이 될 겁니다. 아마 각 의원실이 여성 비서관 채용을 극도로 꺼릴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미투 운동의 최대 피해자가 여성 보좌진이 되는 거예요."

'미투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결국 여성 직원을 뽑지 않는 것'이라는 명쾌하지만 씁쓸한 결론을 이미 모든 여성 보좌진은 알고 있다. 정씨가 카메라 앞에 서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깊은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회의 익명 페이스북 '여의도옆 대나무숲'에는 이번주에도 여러 건의 폭로 글이 올라왔다. 그리고 많은 댓글이 달렸다. 나를 포함한 많은 기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곳을 드나들며 기사 거리를 찾고 있다. 정씨의 어떤 동료는 오늘도 대나무숲에서 미투를 외치고 있을지 모른다. 메아리는 아직 밖으로 퍼져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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