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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사랑했다"는 소녀의 말, 정말 믿어야 할까요?

입력 2017-11-18 13:52

아이들 노리는 그루밍 범죄 #어환희 기자
뉴스의 숨은 뒷얘기! JTBC 취재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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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노리는 그루밍 범죄 #어환희 기자
뉴스의 숨은 뒷얘기! JTBC 취재수첩

[취재수첩] "사랑했다"는 소녀의 말, 정말 믿어야 할까요?


'친밀한 관계'라는 덫 파고 아이들 노리는 그루밍 범죄

Prologue

"사랑하는 사이였다"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는 40대 조모씨가 재판에서 진술했습니다. 그는 당시 15살이었던 여중생 A양을 여러 차례 성폭행하고 임신시킨 뒤 몇 달씩 동거까지 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1, 2심에서 조씨는 유죄를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은 A양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재판을 다시 하라고 판결했습니다. A양이 조씨에게 보낸 편지와 문자메시지 등에서 '사랑한다, 많이 보고 싶다'는 내용과 이모티콘들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5번의 재판 끝에 지난 9일 이 사건은 대법원 무죄 판결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A양의 진의나 당시 A양의 진짜 감정 여부 등을 가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재판부에 영역일 겁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15살의 미성년자였다는 점, 그리고 조씨가 A양에게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친근하게 다가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동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에서 주로 일어나는 그루밍 수법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1. 그루밍이 뭐지?

-그루밍
인터넷 검색창에 단어를 넣어봤습니다. 고양이 사진들이 주르륵 나옵니다. 그루밍은 고양이 같은 털 있는 동물이 이물질을 제거하는 행동입니다. 혀에 침을 묻혀서 온몸을 핥는데 깔끔해지는 효과와 함께 정서적인 안정도 찾게 된다고 합니다. 고양이 주인들은 빗질을 해주면서 그루밍을 통해 고양이들을 길들입니다.

-성범죄와 '그루밍'
성폭력 범죄에서 그루밍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 성적 착취를 하는 수법을 말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어 경계심을 허물고 신뢰를 얻어 자신의 통제 아래에 넣는 것이 그루밍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루밍 과정은 크게 5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중학생 때 3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B양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① B양은 부모님과 다투고 답답한 마음에 집은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은 없었습니다. PC방에서 온라인 채팅을 통해 한 남성을 만납니다. 남성은 B양이 배고프고 당장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② 남성은 방 하나를 내 주며 편하게 쓰라고 했습니다. 외출할 때는 돈을 쥐어주면서 '끼니 거르지 마라'고 했습니다. B양은 이 남성에 대해 착하다, 가족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③ 중요한 점은 이 기간 동안 어떠한 신체적인 접촉도 없었다는 겁니다. B양이 남성에게 경계심을 허물고 정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B양은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이나 속 얘기를 남성에게 편하게 털어놓았습니다.

④ 한 달 쯤 되었을 때 남성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B양의 가슴을 만지려고 한 겁니다. 갑자기 돌변한 남성의 태도에 B양은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⑤ 남성은 돌아가겠다고 하는 B양에게 '우리 사이가 이 정도였냐'고 타이릅니다. 나가면 이렇게 먹을 것과 잘 곳이 있을 것 같냐,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습니다.

권현정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그루밍을 피해자가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B양에게 필요했던 것은 밥, 숙소 등 경제적인 문제였습니다. 관심과 사랑, 진로나 진학을 도와주는 것 등도 아동청소년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2. '요즘 애들'이 그루밍에 넘어갈까?

성인인 저도 사실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서 사례에 나온 B양에게 물었습니다.

-당시 본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왜 했는지?
="가출해서 돈이 없는데, 돈을 준다고 하니까요"

답은 간단했습니다. 남성은 자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며 B양을 살뜰히 챙겼습니다. 다투기만 하던 부모와 달리 B양 말에도 귀 기울여 줬습니다. 한 달 동안 이런 행동이 이어지니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성에 개방적이라는 인식이 많은 탓에 그루밍 수법이 아이들에게 통할까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그루밍 피해자 중 약 65%은 인지 능력에 장애가 전혀 없는 정상적인 아이들이었습니다.

10여년 동안 청소년 상담 선생님으로 지낸 한 취재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에게 '착한 사람'이 뭘까요? 10만원을 주기로 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10만원을 주는 사람입니다. 만약 5만원을 줬다면 아이들에게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돈을 줬다는 사실보다 자신에게 말한 바를 지키는 것, 즉 신뢰가 아이들에게는 생각보다 중요한 거죠."

3. 그루밍을 처벌할 수는 없는 걸까?

-처벌의 법적 근거 부재
성범죄를 위한 준비작업격인 '유인' 행위 자체만으로 처벌할 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강간죄 처벌 규정은 이렇습니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이뤄진 성관계에 대해서는 연령과 상관없이 형법 제 297조에 따라서 처벌할 수 있습니다.(①)
미성년자의 경우, 폭행 또는 협박이 없더라도 '위계 또는 위력'이 있었다면 형법 제 302조에 근거해 처벌할 수 있습니다.(②)
같은 미성년자라도 13세 미만은 폭행, 협박, 위계, 위력 등이 전혀 없어도 성관계 자체만으로 처벌이 가능합니다.(③)

이러한 처벌들은 형법 상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가 있을 때만 처벌이 가능합니다. 사람을 살해한 행위가 있어야 살인죄로 처벌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죠. 강간이나 추행 죄도 해당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수사 및 재판부도 혼란스러운 그루밍
그루밍으로 인한 성범죄는 수사기관, 재판기관에게도 쉽지 않은 사안입니다. 피해 아동·청소년이 표면적으로는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던 연예기획사 대표 사건도 그렇습니다.

연예기획사 대표였던 조씨는 2011년 당시 15살이던 A양을 '연예인을 시켜주겠다'고 접근했습니다. '진로'라는 상대의 욕구를 파악한 그루밍 수법인 셈입니다.

"중학생이 우연히 알게 된 부모 또래의 남성과 며칠 만에 이성으로 좋아해 성관계를 맺었다고 수긍하기 어렵다"
→ 1, 2심이 조씨에 유죄를 선고한 이유입니다.

여기에 조씨는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주장했고, A양과 연인 같이 대화를 주고 받은 편지, 문자 등의 증거들도 나왔습니다.
→ 대법원은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한 이유입니다.

무죄 결정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루밍을 통해 조씨에게 길들여진 미성년자 A양의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4. 그루밍에 대응하려는 움직임들

-그루밍법을 만들자
그래서 그루밍법 제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루밍 행위 자체로 처벌이 가능한 규정을 만들자는 겁니다.

미국에는 이미 관련 법이 있습니다.
연방형법(18 USCS) 2422조에서는 18세가 되지 않은 개인을 "설득, 유도, 유인 또는 강요 (persuade, induces, entices, or coerces)"하는 행위에 대해 제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루밍에 대한 법률적 정의를 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루밍의 정의를 너무 포괄적으로 잡으면 무엇이 법 위반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구체적으로 정하면 법망을 피한 신종 범죄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미성년자 의제강간죄 대상 연령을 최소 16세 이상으로 높이자
이에 13세 미만으로 되어 있는 의제강간죄 기준 연령을 올리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처벌 규정에서 ③번 사례의 대상을 넓히자는 것이죠.

특히 14~16세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전체 아동청소년 그루밍 피해자의 약 44%가 통상 중학생인 이 나이대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의제강간죄 대상 연령을 16세로 정해두고 있습니다. 북한은 15세이고,13세는 일본, 스페인, 나이지리아, 시리아 정도입니다.

UN아동권리협약에서는 아동의 기준을 18세 미만으로 두고 있는 만큼 의죄강간죄 기준연령을 높이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국회에서도 관련 법 개정 움직임이 있습니다.

Epilogue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같이 놀자고 말합니다.
여우는 '길들여 있지 않아서 너와 놀 수 없다'고 합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사람 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자, 그 관계 속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루밍 수법으로 신뢰를 악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하는 것은 이제 사회적 과제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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