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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역사는 짓궂다. 또 모질다"

입력 2018-05-23 21:32 수정 2018-05-24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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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 인연 > 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그는 열일곱 시절 도쿄에서 만난 아사코를, 평생 기억했습니다.

앳된 소학교 1학년생과의 첫 만남과 10년 뒤 세련된 대학생으로 성장한 그와의 두 번째 만남.

그리고 또다시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여인과의 세 번째 만남.

실로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불가에서는 현생에서 옷깃 한번 스치는 이들조차 전생에 수많은 겁의 인연이 있었다고 설명하지요.

아시는 것처럼 겁이란 우주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시간.

물방울이 떨어져 집채만 한 바위를 없애는데 걸리는 시간.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같은 공간을 나누고 있는 우리 역시 굽이굽이 긴 시간을 넘겨서 이어진 인연들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몇 겁의 인연을 갖고 있었을까.

각자의 생을 살아온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5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 노무현, 그리고 이명박.

"결과는 참담했다.
2등도 아니고 3등으로 떨어졌다"
- 노무현 자서전 < 운명이다 >

"예상 밖의 대승이었다.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었다"
- 이명박 회고록 < 대통령의 시간 >

한 사람은 17.66% 득표라는 개인 선거사에서 최악의 성적을 남겼고, 다른 한 사람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한 끝에 당선됐지만 선거부정이 드러나 결국 의원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 그 자리를 가져간 사람은 바로 패자였던 노무현.

"이긴 사람이 물러나자 졌던 사람이 그 자리를 꿰찼다.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됐고, 물러났던 사람은 다시 돌아와서 대통령이 됐다…살아남은 사람은 지금 구치소에 있다…엇갈린 운명이다."

지키고 싶었던 원칙과 명분이 자꾸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했던 노무현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했던 이른바 컴도저 이명박.

이렇듯 부대끼고, 뒤섞였던 그들의 인연 혹은 악연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길게 이어져…

총 16가지 혐의…

무려 110억 원 이상 뇌물수수 의혹을 받는 피고인이 처음 법정에 선 오늘은 9년 전 전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입니다.

1996년, 종로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길고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작가 피천득은 회를 거듭할수록 안타깝기만 했던 여인과의 인연에 대해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억겁의 인연이 거듭되어야 이어진다는 현세의 인연.

그러나 그들의 인연은 악연이었으니.

22년 전 그들 역시 차라리 '아니' 만났더라면…

1996년 종로의 그 순간을 자세히 취재했던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역사는 짓궂다. 또 모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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