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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호구조사, 부끄러움의 기억'

입력 2016-05-03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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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니 국민학교 시절. 신학기가 되면 피하고만 싶었던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의 집안형편을 조사하는 이른바 '호구조사' 였습니다.

텔레비전, 전화, 냉장고, 심지어는 재봉틀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의 집에는 없을 법한 가전제품들이 조사표 위에 나열돼 있었고, 간혹 가다 있는 가전제품에 동그라미를 쳐야 했던, 그러나 대부분은 없어서 그 빈 여백이 부끄러웠던.

부모의 학력을 가늠하는 질문도 있었지요. 대졸, 고졸, 중졸.

내려갈수록 잘못도 아닌데 주눅이 들었던 그런 기억들 말입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써내지 않고 아예 담임 선생님의 질문에 공개적으로 돌아가면서 답을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의 무심함은 어린 동심에게 가난은 '부끄러움' 이란 것을 강요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그런 식의 호구조사는 이른바 변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 호구조사는 모습을 바꿔서 다시 등장합니다.

스물 네 명의 로스쿨 합격자가 자기소개서에 아버지는 물론 조부나 친인척의 이름을 슬그머니 적어냈다고 합니다.

물론 가족이 이른바 사회권력층일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그것은 자기소개서가 아닌 가족소개서.

학벌주의 청산을 요구해온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가 얼마 전에 자진 해산했다고 합니다.

해산의 이유는 학벌주의가 사라져서가 아니었습니다.

학벌보다 더 막강한 것이 따로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요즘 운위되는 금수저, 흙수저. 즉, 태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모임을 해체하기로 했다는 얘기입니다.

하긴 기업은 물론이고 교회까지 대물림하는 시대이니까요.

공개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했던 그때 무심하게도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낡은 그 시절은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은 있었지만 개천에선 종종 용이 나왔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자수성가'라는 칭찬의 말도 붙여졌습니다.

요즘은 개천에서 용 된 사람 잡았다가는 개천에 같이 빠진다는 씁쓸한 농담도 있다지요.

돌이켜보면 그 옛날 호구조사를 하던 선생님은 가난이 단지 부끄러움일 뿐 좌절은 아니란 것을 미필적 고의로 가르쳐 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검사장이라고 쓰는 이즈음 로스쿨의 자기소개서 보다는 기껏해야 재봉틀 정도에 동그라미를 쳤던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의 호구조사표가 더 정겨운….

오늘(3일)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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