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아티클 바로가기 프로그램 목록 바로가기

대한민국 정보기관 잔혹사…정치 개입의 끝은 어디?

입력 2013-07-12 18:30
크게 작게 프린트 메일
URL 줄이기 페이스북 X

[앵커]

오늘(12일)도 금요직격토론 시원하게 말씀해주실 네 분 모셨는데요.

Q. '귀태' 발언에 대한 생각은?

[최영일/시사평론가 : 사전에 있는 말이기는 한데, 제1정치학자 강상준 교수의 책에서 발췌를 해서 쓴 것이다. 귀태라는 말의 문제도 부적절했다고 판단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총리를 동급으로 비교를 했다. 이것이 사실 정치적으로 더 센 발언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묻혔고 귀태라는 말의 윤리적 문제의 책임론이 거세지는 상황이다.]

[정군기/홍익대 교수 : 요즘 새누리당이 몰리는 상황이었는데, 민주당이 말실수를 한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과가 있지만 많은 업적을 많이 남긴 대통령이기도 한데 거론한 것도 문제이다. 민주당은 잘 넘어갈 수 있는 정국을 말 실수로 곤경에 스스로 빠진 형국이다.]

[임방글/변호사 : 저도 귀태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 말을 사용함으로써 말실수를 한 것 같고, 민주당이 발목을 잡힌 것 같아 이 상태가 엉뚱한 데로 빠진 것 같다. ]

Q. 새누리당 모든 일정 취소 적절한 대응인가?

[최영일/시사평론가 : 혼자만의 작심발언이라고 하기엔 대변인이라는 직책이 너무 무겁다. 그래서 총공세를 당하고 있는 것이데, 빠르게 사과를 하고 대변인을 교체하고 본래 일정을 가자고 진도를 나가야하는데 민주당이 강경으로 나가고 있다. 민주당이 풀어야 할 것을 못 풀고 있다.]

[앵커]

여야 갈등이 심해지는 혼란의 모든 근원지는 현재 국정원입니다. 그래서 오늘(12일) 준비한 금요전격토론 첫 번째 주제! 함께 보시죠!

Q. 중앙정보부 당시 '3선 개헌' 내용은?

[정군기/홍익대 교수 : 1969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지 8년이 된 해여서 물러나야 하는데, 이 와중에 한번더 해야겠다는 의혹이 있었다. 그러면서 3선 개헌을 추진하게 되는데 국정원과 여당과 정부가 긴밀한 논의 끝에 추진하게 되고 기초적인 작업으로 JP를 물리치고 김형욱 정보부장을 통해서 작업을 하게 된다. 이때 야당 의원 3명을 빼와 의결정족수에 넘치도록 해 통과를 시켰다. 당시 파동이 굉장히 컸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8년간 정치를 잘 하다보니 개헌안을 놓고 국민 투표를 하는데 67%의 득표율로 승인을 받아 결과적으로 무리없이 넘어간 케이스이다. 당시 야당의원 3명을 공작을 해서 빼가고 이제 맞서 야당이 저항을 했다. 결국 3선을 하고 유신으로 이어졌다.]

[최영일/시사평론가 : 정부기관이 국내정치에 개입했던 사건이 하나의 케이스만 놓고 분석하다 보니 이례적일 것 같지만 정보기관의 역사를 보면 계속적으로 개입을 해왔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해외의 사례도 개입 사례가 많다. 워터게이트도 그 사건의 일부이다. 이미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국가정보원까지의 맥락은 비슷한 패턴으로 있어왔다. 문제는 국민들은 대통령을 믿고 지지를 해줬는데 민주주의의 보루는 그 당시 의회였다. 야당의 일부 의원들이 소수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 정부기관이 동원됐었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아픈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임방글/변호사 : 박정희 정권의 연장을 위해 만든 개헌인데, 신민당 3명을 빼오기 위해 많은 회유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개헌 과정에서 몸싸움 뿐 아니라 정책 과정 등 시대와 역행하는 과정이 있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Q. '김대중 납치사건' 전말은?

[최영일/시사평론가 : 정권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적을 살해하기 위한 시도였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 시절 개헌도 하고 유신도 하는 와중에 대선이 있었는데, 여당의 여론몰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와 100만표이내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겼다. 그리고 유신이 이루어졌다. 결국 간선제로 대선은 바꿔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적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안했던 것이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 의원시절에 미국 망명도 다녀오고 일본으로도 도피하는 와중헤서 바다에 수장이 되는 상황까지 갔다. 수장 되기 직전 미국의 저지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당시 박정희 정부가 김대중 의원을 살해하기 직전 일본과 미국의 공조로 살아남게 되었고, 이것은 김형욱 회고록에 빼곡하게 담겨있게 되고 그 이후 밝혀지게 되었다.]

[정군기/홍익대 교수 : 중앙정보부의 역사를 보면 참 재미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구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때 실질적으로 당을 만든 것은 김종필이었다. 그런데 본인도 2인자로서 설움을 겪다가 바뀌고 김형욱까지 왔는데 공작을 하다 여론이 안좋아 교체를 하게 되고 이후락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또 좋지 않을 결과가 있었다. 나중에 90년대 많은 결과들이 밝혀져서 사과도 하는 일이 있었다.]

[최영일/시사평론가 : 김형욱 당시 정보부장은 미국에 이민을 갔고, 프랑스까지 도피를 했는데 의문의 실종으로 처리가 되어있다.]

[정군기/홍익대 교수 : 죽음의 과정도 재미있다. 기계에 말려서 죽었다는 말도 있는데 시신은 남아있지 않다. 얼마나 나쁜 일을 하면 죽음에 대한 의혹까지 있을까 싶다. 김대중 대통령 납치가 될때 동해바다에서 수장하지 말라고 한 기관은 CIA였다는 얘기가 있고 얽히고 섥혀있다.]

[최영일/시사평론가 :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상에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정을 자서전에 자세히 담겨있고, 전체적인 정치적 정황은 김형욱 회고록에 담겨있다. 20년 후가 되어서야 알게 된 사건이다.]

Q. 안기부 당시 '용팔이 사건'에 대해서?

[최영일/시사평론가 : 신민당이라는 야당이 있었다. 정부의 통제를 받는 야당이었다. 그래서 통일민주당이라는 적극적인 야당을 만들이 위해 김영삼, 김대중 의원들이 전국의 20개의 지구당을 만들었다. 용팔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폭들이 동원되서 지구당을 습격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밝혀진 것을 보니 당시 국가안기부부장인 장세동이 신민당 의원을 매수 공작을 해서 안기부 자금을 집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두 신민당 의원이 청부 깡패를 동원해서 조직적으로 새로운 야당의 등장을 막았다고 드러났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 국회에서 문제가 되서 전모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사실 신민당 두 의원의 공작이었다고 무마가 되었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되고 나서 새롭게 안기부의 개입까지 밝혀졌다.]

[정군기/홍익대 교수 : 70년대 당권싸움을 할때 김영삼 대통령이 깡패에게 내쫓겨서 태평로를 건너가는 모습이 사진에 잡힌 것이 있었다. 정치 깡패의 역사는 고질적이다.]

[최영일/시사평론가 : 정보기관이 현실 정치에 개입해서 야당을 탄압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Q.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내용은?

[임방글/변호사 : 그 당시 85년에 서울대에 있는 민주화추진위원회라는 비밀조직을 이적 단체로 규정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입건을 했는데 수배자였던 한명을 찾기 위해 박종철 서울대 언어학과 4학년이었는데 불법 체포해서 수사하는 과정에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사망했다. 사망한 다음 날 발표하기를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얘기했는데 말이 되나.]

[정군기/홍익대 교수 : 그 당시 사건기자를 했었다. 경찰이 처음에는 축소 은폐를 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말이 안되는 상황이어서 여론이 들끓다 보니 안기부를 중심으로 정보기관이 회의를 해서 2차 축소은폐를 하기 된다. 이 당시 특종을 중앙일보가 했다. 참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광고

JTBC 핫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