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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달걀 없는 세상에서 달걀을 그리워하다'

입력 2017-08-16 22:30 수정 2017-08-1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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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열흘에 한 번쯤 들르는 계란 장수를 반겼습니다.

짚으로 엮은 계란 열 개들이 한 꾸러미를 들여놓는 날이면 안 먹어도 배가 불렀습니다. 물론 이건 살림살이가 좀 나을 때 얘기이고, 그렇지 못하면 계란 장수는 건너뛰는 게 다반사였지요.

잘 살고 못 살고가 계란으로 갈렸던 60년대의 이야기입니다.

형편이 훨씬 더 풍요로워진 80년대에도 여전히 계란은 잘 살고 못 살고의 지표였던 모양입니다.

부천 원미동에 사는 임 씨.

겨울엔 연탄을 배달했고, 다른 계절엔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비가 와서 일을 못 나가는 날엔 떼인 돈을 수금하려 애를 썼지요.

그러나 궁핍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어느 날 술을 거나하게 걸친 임 씨는 주먹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달걀 후라이 한 개 마음 놓고 못 먹는 세상!"

1980년대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양귀자의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에 등장하는 일화입니다.

그리고 삶은 더 나아져서 21세기 하고도 17년이 지난 지금은 '친환경란' '무항생제 인증란', 고급스러운 이름을 붙인 계란이 나오는가 하면 계란 위에 왕란. 특란… 대란. 이름도 빛깔도 저마다 다양한 계란의 세상.

그러나 그 흔하디 흔한 계란은 불과 하룻밤 사이에 우리의 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대형마트 판매대에서도… 빵집과 식당에서도… 학교 급식에서도…

닭 한 마리당 A4용지 크기도 안 된다는 빽빽한 철장과 기존 살충제는 내성이 생겨 더 독한 살충제로 버텨야 하는 참혹한 양계장의 풍경.

사람들은 계란이 어떻게 생산되고 있는지를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탐욕의 대량생산과 값싼 소비를 위해서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해 온 대가는 지금 우리에게 마치 부메랑처럼 돌아왔고…

우리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달걀 없는 세상과 마주하고 있으니.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30년 전 원미동의 그 사내처럼 주먹을 흔들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달걀 후라이 한 개 마음 놓고 못 먹는 세상!"

그리고 저는…자주 먹진 못했어도 깨끗하기만 했던, 짚으로 엮은 달걀꾸러미를 그리워합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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