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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의 참혹한 목격자…전쟁포로 교환 당시 영상도

입력 2019-07-25 21:33 수정 2019-07-2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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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정전협정 과정에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건 포로교환 협상이었습니다. 저희가 입수한 영상 속에서도 당시 참혹했던 포로들의 모습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상처밖에 남지 않는 전쟁의 실체, 정해성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제가 지금 나와 있는 이곳, 거제시 수월동은 6.25전쟁 당시 다친 포로들을 치료한 64야전병원이 있던 곳입니다.

지금은 논으로 바뀌어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입수한 영상 속에는 66년 전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막사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막사엔 전쟁 포로를 뜻하는 약자인 'PW'가 새겨져 있습니다.

전쟁으로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 머물렀던 수용소입니다. 

내부 현실은 영상보다 더 열악했습니다.

[이재철/당시 반공포로 : 포로 병원에 있을 때 밥이 적지. 더 배가 고픈 거야. 물을 넣어가지고서 죽을 만들어 먹었어.]

부상 포로들을 치료할 인력도, 시설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재철/당시 반공포로 : 난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빨리 낫는 거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거의 다 그냥 (다리를) 잘랐어. 추우니까 동상 걸려서…]

정전협상이 늘어지던 53년 4월.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머리를 깎은 북한군이 미군에게 검사도 받았습니다.

결국 유엔군과 공산군이 부상 포로부터 먼저 교환하기로 한 겁니다.

다친 포로들을 북으로 돌려보낸 길도 험난했습니다.

포로들이 판문점을 가기 위해 부산역에 도착했습니다.

목발을 짚은 북한군이 절뚝거리며 기차에 탑니다.

미군이 들것에 실어 옮기기도 합니다.

여성 포로들도 비좁은 기차에 다 같이 탔습니다.

병원에서도, 돌아가는 기차에서도 포로 생활은 고단했습니다.

포로 교환 장소엔 건물도 없이 책상 한 개만 놓였습니다.

서명 외에는 다른 절차도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가 보낸 부상 포로는 5800명, 북한은 600명. 

부상 포로들을 교환한 후에도 전쟁은 석 달 동안 더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정전 협정이 발효됐습니다.

전쟁 3년 동안, 파악된 사망자만 137만여 명에 달합니다.

(화면제공 :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포로수용소유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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