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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법관과 스폰서' 그리고 사법 농단의 '민낯'

입력 2018-09-03 18:15 수정 2018-09-03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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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법관과 스폰서' 그리고 사법 농단의 '민낯'


◇ 판사 비위 사실 알게 된 법원행정처의 큰 그림?

2015년 8월 11일.
대검찰청 이금로 기획조정부장은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의 임종헌 기획조정실장(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의미심장한 친전 하나를 보냅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관련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 부산지역 건설업자 정△△ 씨에 대한 수사를 하는 도중에 정씨가 부산고법 소속 문○○ 판사의 부적절한 유착관계가 파악됐다. 문 판사가 오래 전부터 정씨와 어울리며 최근 수사와 관련해 정 씨에게 법률 조언을 해온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있다. 』


지역 건설업자와 지역 판사의 오랜 '스폰서' 관계가 제도권 내에서 수면 위로 드러난 건 이 때가 처음입니다. 소위 '부산법조비리'의 시작입니다. 이 내용을 전달받은 법원행정처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 (1) 정식 감찰 절차를 가동해 조사 후 원칙대로 처리한다.
    (2) 일부 사법행정라인 판사들이 공유 후 의혹을 덮는다. 』


먼저 (1)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전국 법원의 인사·감사·행정 같은 업무 전반을 관장하는 법원행정처에는 윤리감사관실이 있습니다. 법원사무기구에 관한 규칙을 살펴보면 윤리감사관실은 '법관에 대한 징계에 관한 사항', '법관에 대한 진정, 비위사항의 조사' 기능을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검찰의 친전 내용은 윤리감사관실에 정식으로 접수되어 조사 절차를 밟게 됩니다. 행정처의 다른 부서가 관여할 수 없고 윤리감사관실이 독립적이고 주도적으로 처리합니다. 적어도 '검찰이 침소봉대한 것 아니야?' 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당사자에 대한 조사는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검찰의 통보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면 법관 징계위원회를 열고 비위에 맞는 징계 등 조치가 이뤄집니다.
하지만 당시 법원행정처는 (2)안을 선택합니다.


◇ '구두 경고'를 했으니 의혹을 덮은 건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

사실상 아무 징계도 받지 않은 문 판사는 2017년 2월, 부산지역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해 6월, JTBC를 비롯한 일부 언론에서 문 판사에 대한 비위 의혹 조사와 징계 처리가 정식 절차에 따라 이뤄지지 않은 사실을 포착하고 법원행정처를 비판하는 보도를 합니다. 당시 사건에 다시 관심이 쏠리자 법원행정처는 "당시 검찰로부터 비위 사실을 전달받은 바 없다"고 해명합니다. 검찰이 이 주장을 반박하자 "검찰이 보낸 서류는 정식 공문이 아니었다"고 말을 바꿉니다. 또 "당시 문 판사에게 직무상 명령에 해당하는 경고 조치를 했다"며 비위사건 처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경고가 징계냐 아니냐를 두고 '판사스러운' 반박이 이어지면서 '부산법조비리'는 다른 뉴스에 밀려 해결되지 못한 채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잠행을 이어갑니다.


◇ 임종헌 PC 속 그 문건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올해 7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 PC 문서 파일 중에 < 문○○ 판사 관련 리스크 검토 >라는 파일을 발견합니다. 작성시점은 2016년 9월. 그러니까 법원행정처가 문 판사 비위사실을 검찰로부터 통보받은 지 1년이 더 지난 때입니다. 여기엔 다소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 나옵니다. 문 판사 비위 사건에 대해 정식 조사가 이뤄지면 외부에 노출돼 사법부 전체가 망신당할 것이 우려되니, 문 판사에게 전화로 '구두 경고' 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는 조치 경과가 정리돼 있었습니다. 당시 사법부가 자기 조직에 흠집이 나는 것을 우려해 비위 판사를 눈감아 준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에 대해 "당시 법원행정처가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철저히 사법부 이익을 위해 움직인 한 단면"이라고 평가합니다.

 
[취재설명서] '법관과 스폰서' 그리고 사법 농단의 '민낯'



◇ 건설업자 정씨 재판까지 챙긴 법원행정처

같은 문건에는 한 재판에 대한 전략도 적혀있습니다. 바로 건설업자 정씨가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게 뇌물을 줬다는 혐의 등으로 진행 중인 재판입니다. 일선 법원의 원활한 재판을 지원하는 행정적 업무만 담당한다던 법원행정처가 지방 법원의 작은 사건에 대해 별도로 작성한 문건입니다.

 
[취재설명서] '법관과 스폰서' 그리고 사법 농단의 '민낯'



사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건설업자 정씨가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게 뇌물을 줬다, 이 돈은 회삿돈을 빼돌린 것"이란 혐의입니다. 2015년 대검찰청에 들어온 첩보를 넘겨받아 부산지검 특수부가 수사한 사건입니다. 정씨는 2016년 2월 1심 재판에서 횡령은 유죄, 뇌물공여는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부산 법조계에선 "정씨가 평소 법조계 인맥 관리를 하더니 그 덕을 본 것 아니냐"는 풍문이 돌았습니다. 부산고법에서 근무하는 문 판사가 재판 정보를 빼내 자신의 '스폰서'인 정씨 쪽으로 흘려줬다는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부산 법조계를 시작으로 빠르게 퍼집니다.

 안팎에서 나온 '위험 신호'를 감지한 법원행정처가 이 국면을 헤쳐 나갈 전략을 정리한게 바로 < 문○○ 판사 관련 리스크 검토 > 문건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건설업자 정씨와 문 판사 유착이 재조명될 우려가 있으니, 항소심은 제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여야한다'는 겁니다. 이미 모든 절차를 마치고 선고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제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재판부가 변론 재개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도 언급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을 내기 전 다시 공판을 조금 더 진행하면서 양측 입장을 들어보는 모양새를 취하자는 것이었죠. 재판부를 움직이기 위해 법원행정처장이나 차장이 부산고법의 수장인 법원장에게 직접 연락하자는 의견도 담겼습니다.

당시 부산고법 재판부가 문건에 담긴 '작전' 대로 행동했을까요? 이를 밝히기 위해 검찰은 최근 당시 부산고법원장이었던 윤인태 변호사를 비공개 소환해 조사했습니다. 윤 전 법원장은 조사에서 '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의 전화를 받았고, 전달 받은 내용을 2심 재판부에 전달했다'는 취지로 진술했습니다. 실제 1심에서 무죄였던 정씨의 뇌물 혐의가 2심에서 유죄로 바뀝니다. 물론 재판부가 법원행정처의 지시를 따른 것인지는 더 조사가 필요합니다.


 
[취재설명서] '법관과 스폰서' 그리고 사법 농단의 '민낯'


◇ '부산법조비리'와 '양승태 코트(court) 사법농단'

최근 검찰은 정씨가 관리해온 인물이 문 판사 말고도 여러 명인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 중에 박근혜 청와대의 핵심 인물인 현기환 전 정무수석도 포함돼 있습니다. 검찰과 부산 법조계 등에 따르면 부산 출신인 현 전 수석은 서울에 근무하며 고향에 내려와 정씨와 문 판사 등과 가깝에 어울렸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정씨는 문 판사에게 소개받은 전현직 고위 판사들과도 수시로 어울렸다고 합니다. 검찰은 이들이 자주 어울린 부산 지역의 골프장 대표와 정씨의 사업 파트너 등 주변 인물들을 불러 관련 조사를 마친 상태입니다.

법원행정처는 문 판사 비위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고 필요한 징계를 했어야합니다. 하지만 당시 사법부의 누군가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고, 잘못된 지시가 오갔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이를 따랐습니다.


"국민의 신뢰야말로 사법부의 유일한 존립 기반"
-지난해 9월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사 中


이런 잘못된 흐름 속에서 누가 책임을 져야할 지는 검찰 수사를 통해 곧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흔들린 사법부의 존립 기반이 바로 서는 게 쉬워 보이진 않습니다. 사법부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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