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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29일 '고바우 영감'도 '전삭'…검열 뒤엔 '필' 도장

입력 2019-05-30 21:16 수정 2019-05-30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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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검열을 거친 기사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실제로 발행된 신문 지면과 비교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윤샘이나 기자가 나와있습니다. 지금 400쪽 가까이 되는 분량, 굉장히 많은 양입니다. 이것이 처음 공개되는 것입니까?

[기자]

그렇습니다. 당시 신군부가 보도지침을 만들어서 언론을 통제했다는 사실은 이미 굉장히 잘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 검열관들이 기사를 지우거나 바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내부 문건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중앙대학교 이민규 교수가 당시 검열에 직접 관여했던 관계자로부터 받은 자료를 39년간 보관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한 것입니다.

[앵커]

이것이 당시 검열되기 전의 기사들 지금 보고 있습니다. 검열되기 전이죠, 그러니까. 빨간펜으로 기사를 고친 것이 저것이 검열의 단 과정을 이야기해주는 것인가요?

[기자]

네 그렇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기사는 80년 5월 20일자 한 신문의 지면인데요.

'10·26 사건 대법원 판결문' 전문을 실은 지면입니다.

그런데 보시는 것처럼 검열을 거치면서 이렇게 붉은색 굵은 사인펜으로 판결문 내용 전체를 빼라는 표시가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뒤에 '검열 필'이라는 도장을 찍었는데요.

이것은 검열을 마쳤다는 뜻입니다.

지금 보시는 또다른 지면에도 재야운동가 함석헌 선생이 발간한 잡지에 관련된 기사가 실린 모습을 보시고 있는데요. 보시는 것처럼 굉장히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서 지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앵커]

저는 84년 입사인데 제 선배들로부터 굉장히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기사를 쓰고 가지고 가서 서울시청에 가면 검열단이 있는데 보는 앞에서 찍찍 그었다. 모멸감 이런 얘기들을 많이 들은 바가 있는데 이거 보니까 아주 정확하게 다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만평도 검열 대상이었다고요?

[기자]

시사만평은 전삭, 그러니까 전면 삭제의 단골소재였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80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7면 지면입니다.

원래 7면 맨 왼쪽 상단에 '고바우 영감'이라는 4컷짜리 만평이 매일 게재가 됐었는데요.

[앵커]

유명한 만평이었죠.

[기자]

이날은 짧은 기사 3개로 대체돼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영월에서 신라시대 비석 2개를 발견했다는 기사가 하나 있고요.

그 밑으로는 세탁소에 불이 났다는 기사와 조기축구 회원이 축구공에 맞아 숨졌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확보한 문건에는 삭제되기 전에 원래 실으려고 했던 만평이 남아 있는데요.

지금 현재 화면에 보시는 바로 이 만평입니다.

'광주 시민들의 마음에도 복구가 필요하다.'

이런 것이 4컷짜리 만평에 제일 마지막에 그렇게 표시가 되어 있는데 결국에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것입니다.

[앵커]

신문을 인쇄하기 전에 만평 대신 다른 기사를 넣은 것이다. 이렇게 봐야 되겠군요, 그렇다면.

[기자]

그렇습니다. 급히 지면을 바꾸다 보니 굉장히 어설픈 편집도 눈에 띄는데요.

지금 보시는 것은 80년 5월 31일자 경향신문 지면입니다.

'복수전화 가입, 설치기준 강화'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띄는데 지금 보시면 제목의 크기가, 글자 크기가 굉장히 어색하게 큰 것을 볼 수 있고요.

[앵커]

저 란을 다 채울 수가 없었군요, 기사로.

[기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제목을 키웠는데도 불구하고 기사 길이가 맞지 않아서 밑에 보시면 여백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청개구리'라는 당시의 경향신문에 게재됐던 시사 만평이 들어갈 자리를 급하게 대치하다 보니 저런 편집이 나온 것 같습니다.

[앵커]

아무튼 아까 제가 말씀드리기를 당시에 느꼈던 모멸감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심해서 결국에는 제작 거부운동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

광주의 참상을 다 취재해서 기사를 다 써놓고도 이것이 삭제가 되거나 또 계엄사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다 보니까 당시 기자들이 "아예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만들지 말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제작 거부를 하겠다고 쓴 기사들마저 검열을 통해서 삭제가 됐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작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기자들이 해직되고 이후 언론 통폐합이 이루어지는 단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앵커]

검열된 기사의 양이 워낙 많다 보니까 소개되지 않은 내용도 많을 것 같습니다.

[기자]

더 자세한 내용은 오늘 밤 방송되는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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