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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② 글로 보는 사법농단 '공소장일본주의를 법정에 세우다'

입력 2019-05-0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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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② 글로 보는 사법농단 '공소장일본주의를 법정에 세우다'

#. 2월 26일 양승태 보석심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흡사 조물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검찰이) 300쪽이나 되는 공소장을 만들어냈다"
"정말 영민한, 그리고 목표의식에 불타는 수십 명의 검사들이 법원을 샅샅이 뒤져 작성한 20여만 쪽에 달하는 증거서류가 내 앞에 장벽처럼 가로막혀 있다"
"어쨌든 이 공소장에 대해서 저는 대응해야 한다. 무소불위의 검찰과 마주선 상황에서 내가 가진 무기는 호밋자루 하나도 없다"
등 13분간 작심발언을 이어갔습니다.

#. 3월 11일 임종헌 첫 공판

재판에 넘겨지고 117일 만에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첫 재판.
양 전 대법원장과 약속이나 한 듯 공소장에 대한 비판을 시작합니다.
그는 A4용지에 빼곡히 적어온 내용을 10여분 간 굵은 목소리로 낭독했습니다.
"공소장에 켜켜이 쌓여있는 검찰발 미세먼지로 형성된 신기루에 매몰되지 말고,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공정하고 충실하게 심리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 문건은 "브레이스토밍하듯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내부문서일 뿐이고, 사법부가 재판거래를 통해 정치권력과 유착했다는 검찰 주장은 가공의 프레임"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사법농단 재판 첫 쟁점, 검찰 공소장

두 사람은 검찰이 자신들에 대한 공소장에 기록한 범죄사실이 모두 거짓이고, 조작됐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반했다"고 기소된 것 자체가 무효라고 말합니다.

'공소장일본주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뿐 아니라 최근 법정에 선 주요 사건의 피고인이 유행처럼 주장하는 원칙입니다. 사법농단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연구관부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순실씨, 최근엔 이재명 경기지사와 정봉주 전 의원도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공소장일본주의는 형사소송법 제254조에 근거한 원칙입니다.

검찰이 피의자를 재판에 넘기면서 제출하는 공소장에 법원이 유죄나 선입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나 서류를 첨부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홍길동이 살인을 했다면 형법 제250조1항에 의해 사람을 살해한 자라는 점을 기재하고, 범죄가 발생한 시일과 누구를 살해했는지 적어주면 됩니다.

그 외에 홍길동이 어려서부터 폭력적 성향이 강했고, 옆집 강아지를 때리는 등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했고 과거 피해자가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말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복수하려던 마음을 오랜 시간 간직해왔다며 관련 서류를 함께 넣어 '살인할 사람'이란 복선을 공소장에 녹여선 안된다는 겁니다. (중요한 쟁점인 '동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형사소송법
형사소송법 제254조(공소제기의 방식과 공소장) ①공소를 제기함에는 공소장을 관할법원에 제출하여야 한다.
②공소장에는 피고인수에 상응한 부본을 첨부하여야 한다.
③공소장에는 다음 사항을 기재하여야 한다.
1. 피고인의 성명 기타 피고인을 특정할 수 있는 사항
2. 죄명
3. 공소사실
4. 적용법조
④공소사실의 기재는 범죄의 시일, 장소와 방법을 명시하여 사실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⑤수개의 범죄사실과 적용법조를 예비적 또는 택일적으로 기재할 수 있다


그러나 공소장일본주의는 2009년 이전까지 사문화된 원칙이었습니다.

검찰이 각종 영장을 청구하며 각종 수사기록을 법원에 제출하거나, 공소장에 피고인의 내심까지 설명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법원 역시 이를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승태, 2009년엔 '범죄의 동기, 배경도 중요'… 10년 지나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

공소장일본주의에 대해 대법원이 치열하게 논쟁한 건 2009년입니다. 2007년 대선에서 창조한국당 후보로 나선 문국현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입니다.

문씨 측은 공소장에 범죄사실과 관계없고, 입증되지 않은 내용이 기록됐다며 공소장일본주의 위반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다수의견에서 공소장의 특성상 법률이 정한 범위로 공소사실을 한정해 넣긴 어려운 점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범죄사실을 명확하게 정리하기 위해선 관련 설명을 넣을 수밖에 없고, 이를 어느 정도 용인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반면,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전수안 대법관은 공소장일본주의가 공정한 재판이라는 대원칙을 강조한 것으로 타협이 있어선 안된다는 의미를 담아 반대의견을 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양 전 대법원장이 2009년에는 다수의견에, 그리고 피고인이 된 현재엔 반대의견의 입장을 취한다는 겁니다.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은 다수의견보다 더 강한 보충의견을 냈습니다. 최고법원 구성원으로 판단할 때와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 마주한 현실이 너무나 달랐던 것일까요?
 

양승태 전 대법관 시절 보충의견 중
"범죄의 동기나 경위, 범의와 공모 관계, 범행의 배경이 되는 정황 등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구체적인 범죄 행위를 특정하고 그에 대한 형사 책임의 유무와 범위를 심리 판단하는 데에 필요한 요소이므로 범죄사실을 특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도 기재를 요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사안이 복잡하거나 범행 수법이 교묘한 경우 또는 상황적 요소에 의해 범죄의 성립 여부가 좌우되는 미묘한 사안에서는 범행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배경 등 전후의 정황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한 범죄구성요건에 직접 해당하는 행위만을 기재하여서는 공소사실을 완성도 높게 특정할 수도 없다. "
--중략 --
"공소장일본주의를 소수의견과 같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경직되게 이해한다면 오히려 형사사법절차를 비효율적,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정의의 실현에 장애가 초래될 것이다. 다만 이 사건 공소장과 같은 기재방식은 불필요하게 장황하고 산만하여 공소사실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기재하여야 한다는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고, 공소장일본주의 위배 여부에 관한 시비도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 향후 개선이 필요하리라 본다."
(출처 : 대법원 2009. 10. 22. 선고 2009도7436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정치자금법위반] ) 


검찰 공소장 관행 바뀔까

과거 검찰은 공안사건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재판에 넘기며 그가 자란 환경과 사상을 공소장에 담기도 했습니다. 시절이 바뀌어 권력자나 재벌에 대한 수사가 주목을 받으며 이들의 공소장에 그가 가진 권력의 범위와 영향력,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대적 상황을 묘사해 넣었습니다. 사문화됐던 공소장일본주의 위반 주장이 최근 법정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사법농단 재판에서도 공소장일본주의 위반 주장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최고 재판 전문가가 피고인이 되어 주장한 논리기 때문입니다.

먼저 판단을 내놓은 건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입니다.

지난달 25일 재판부는 법정에서 검찰 공소장의 문제점을 직접 지적했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에서 상명하복 풍토가 조성됐다' '법원행정처 소속 법관들은 대법원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등 검찰의 판단이 담긴 부분을 삭제하라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최근 검찰의 공소장 변경을 허락해 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재판부가 공소장에서 삭제하거나 바꿀 부분을 조목조목 정리해주고, 이에 맞춰 검찰이 낸 신청을 받아들여 준 겁니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은 공소장일본주의에 위반된 걸 인정하고도 공소기각 판결을 하지 않는다며 불만입니다. 반면 검찰은 공소장에 담긴 '군살'을 정리해서 재판 진행을 원활하게 하려는 재판부의 고민이 반영된 것일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하고 있죠. 재판부의 정리로 공소장일본주의에 대한 논란은 이번 재판에서 주요 쟁점이 되긴 어렵게 됐습니다.

다만, 재판 전문가라고 불리던 이들이 시작부터 외친 공소장일본주의가 수많은 피고인들에게 새로운 방어기재가 될 것이란 점은 주목할만 합니다. 덕분에 검찰도 공소장을 가볍게 만들 필요성이 생겼지요. 변화하는 검찰의 공소장을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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