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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플러스 15회] 살아남은 자들, 트라우마에 갇히다

입력 2014-05-2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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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사고 수습 과정은 온 국민을 분노하게 하는 것을 넘어 과연 대한민국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가 하는 절망감을 던져줬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살릴 수 있었던 탑승자를 못 살린 것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탐사플러스에서는 세월호 참사의 2차 피해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살아 남았지만 산 것 같지 않다고 하소연하는 세월호 생존자들, 이들이 겪는 고통은 어떤 것인지, 탐사플러스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지난 5월 10일, 경기도 안산의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병원 차가 도착하더니 두 남성을 휠체어로 옮깁니다.

다리는 온통 붕대로 감겨 있습니다.

국화 한 송이를 손에 들고 희생자 영정들 앞으로 향하는 남성들.

눈시울은 금세 붉어졌습니다.

차마 영정 사진들을 올려다 보기 힘든 듯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훔칩니다.

이들은 세월호 생존자 최재영씨와 윤길옥씨입니다.

[최재영/세월호 생존자 : 그 마지막 나올 수 있는 문이 닫히면서 눈빛을 교환을 했는데 그걸 마지막으로 걔들은 못 나왔잖아요. 그게 자꾸 생각이 나네, 걔들이…]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비록 살아남았지만, 최씨는 공포에 새파랗게 질린 아이들을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더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최재영/세월호 생존자 : 다 어린 친구들한테 도움도 되지 못하고 도와주지도 못하고…나만 살아서 나와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최씨는 세월호 사고 당시 무엇을 보았고,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 걸까.

취재진은 최씨를 다시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아 나섰습니다.

병실 앞에서 만난 최씨의 표정은 분향소에서보다 다소 밝아 보였습니다.

최씨는 사고 당시 세월호 3층 식당에 있었습니다.

[최재영/세월호 생존자 : 뜨거운 온수통 앞에서 물을 담는 과정에서 ‘콰콰콰쾅’ 소리 나더니 배가 갑자기 50도로 기울어 버리더라고. 물통 잡고 있다가 바로 그대로 뒤집어 써버렸어. 하반신이 거의 화상을 입었지…]

화상을 입은 최씨의 눈 앞에 아비규환의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재영/세월호 생존자 : 배가 기울면서 한쪽으로 쏠릴 거 아니에요. 냉장고가 쏠렸는데 그 사이에 여학생이 하나 낀 걸 봤어요. 신음을 끙끙하더라고. "이것 좀 꺼내주세요", "밀어주세요" 하면서. 도저히 나로서는 어떻게 해줄 방법도 없고…저 친구도 화상 입고 누워 있고 그 옆에는 머리 깨진 사람이 피를 흘리고…]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은 배가 기울어 바닷물에 입구가 막히기 직전이었습니다.

[최재영/세월호 생존자 : 얘들아 나가자, 그 안에 사람이 30~40명 정도 있었어요.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면 밑에서 물이 빨아 당겨요.]

탈출한 사람은 20명 남짓.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 끝내 나오지 못한 여학생들의 간절한 눈빛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최재영/세월호 생존자 : 남학생 2명은 뛰어내렸어요. 여학생 3명은 뛰어내리라고 했는데 2명은 구명조끼도 못 입고 있잖아요. 못 뛰어내리는 거예요. 그 여학생들 눈빛 때문에 힘들어요. 그것 때문에…]

세월호 참사를 직접 겪은 생존자들의 정신적 충격과 트라우마. 취재진은 전국에 흩어진 생존자들을 더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제주의 한 병원. 병실 앞에는 면회사절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생존자 김동수씨가 있는 병실.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레 들어가 만나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저 JTBC 손용석 기자입니다. 따님이신가 봐요?) 네.]

사고 당시 김씨가 촬영된 영상입니다.

배가 80도 가까이 기울어진 상황. 김씨가 혼자 난간에 기대서 배 안으로 소방호스를 집어넣고 있습니다.

잠시 뒤 호스를 끌어당기자 밑에서 올라오지 못하던 한 남성이 당겨져 올라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임에도 김씨가 다른 승객을 구출한 겁니다.

이때는 사고 현장에 출동한 해경 123구조정이 세월호 선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상황실에 보고를 했던 바로 그 시각입니다.

[해경 123정 / 사고 당일 오전 9시 55분 : 경사가 너무 심해서 지금 하선을 못하고 있습니다.]

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김씨는 다시 소방호스를 둘러메고 배 후미로 옮겨갑니다.

당시 헬기에서 세월호 선체에 내린 해경 구조대원들은 밖에 서서 자력으로 탈출하는 승객들만 찾고 있었을 뿐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배가 90도 이상 기울고 있었는데도 배 안쪽으로 엎드려 소방호스를 넣습니다.

[김동수/세월호 생존자(10여 명 구조) : 어른이고 뭐고 다 빠졌어요. 난리가 나서 소방호스를 다시 가져 가고. 하나 해서 안 되니까 또 이쪽에 매달린 소방호스 가져가고… 학생들은 둥둥 떠 있었고 어른들도 나오지 못하니까 계단에도 다 매달려 있었고…]

김씨가 구한 사람 10여 명 가운데는 가족을 잃고 물에 잠겨 있던 6살 권모 양도 있었습니다.

[김동수/세월호 생존자(10여 명 구조) : 원래 아이가 안 보였어요. 구명조끼만 둥둥 떠 있었지. 구명조끼가 크니까 아이는 물속에 잠겨 있고… (구명조끼를) 올리니까 같이 끌어올릴 수 있었던 거지.]

김씨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 배에서 나왔습니다.

사고 후 김씨는 세월호 참사 속 10명 이상을 구한 의인으로 언론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김씨의 상태는 과연 어떨까.

[김동수/세월호 생존자(10여 명 구조) : 저기 지금 200~300명 다 갇혔다고… 나올 때 창문에 다 붙어가지고 창문을 손으로 때리는 학생들을 보고 나와서 얘기해도 그 사람들이 자기 특공대 출동할 거니까 걱정 말라고…]

김씨는 구조한 사람들에 대한 뿌듯함은 한 치도 없고,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뼈저린 미안함만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의 참담했던 기억은 죄책감으로 변해 김씨를 괴롭혔습니다.

[김동수/세월호 생존자(10여 명 구조) : 지금 내가 후회되는 것이 중간에 왜 내가 들어가서 학생들을 인도 안 하고 빨리 움직이라고 안 했는지 죄책감에, 중간에 기억이 없어요.]

김씨는 사고 당시에 대한 단기 기억상실증세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김동수/세월호 생존자(10여 명 구조) : 처음 생각 다 나요. 4층 구조 그 홀 많은 사람 보고, 그 광경 보고 그 이후가 생각이 안 나요. 그 뒤에 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옆에 어린이 도와주세요.' 그때 생각밖에 없어요. 나머지 중간은 생각이 안 나요.]

세월호 참사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과거의 기억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병실에서 만난 이양심 씨의 표정은 넋이 나간 듯 보였습니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 있는 이씨는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양심/세월호 생존자 : 심장이 뛰어요. 불안해가지고. 잠 못 자다가 요즘에 잠 좀 조금씩 자다가 계속 깨요. 더 불안한 거예요. 저는 집에 있으면 더 불안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가스불 켜놔도 잊어버리고 뭘 해도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요.]

세월호가 80도 이상 기울었던 그 순간, 이씨는 남편의 손을 잡고 간신히 배에서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이씨의 삶은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씨에게는 세월호 사고를 당하기 전 이미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금쪽같은 아들을 군에 보냈다가 4년 전 해군 고속정 참수리 295호 침몰 사고로 영영 떠나 보낸 것입니다.

이번 사고에 과거의 정신적 충격과 상실감까지 겹쳐 있는 겁니다.

[이양심/세월호 생존자 : 아들 사진 안 보면 불안하니까 지금도. 아들 사진 그리고 얘가 부른 노래도 듣고. (아들) 핸드폰 충전시켜서 목소리 듣고 싶으면 듣고…]

이씨는 아들의 기억을 더듬어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세월호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이미 하늘로 떠나 보낸 아들이 구해준 덕택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양심/세월호 생존자 : 그때도 우리 아들을 이름 부르고 찾았어요. 엄마 아빠 구해달라 그랬어요.]

치료가 언제될 지 기약도 없습니다.

[홍태철/이양심씨 남편(세월호 생존자) : 이 사람은 많이 놀랐나 봐요. 밤에 이불에 오줌 싸고 막 그러네. 10일 정도 입원했다가 괜찮아졌다 싶어 퇴원했는데 더 심해져가지고 다시 입원시킨 거예요.]

자식을 잃은 희생자 가족들의 정신적 고통도 갈수록 커지긴 마찬가지입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었는데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자책감은 분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종열/세월호 희생자 가족 : 잎이 까맣게 다 죽은 국화를 주시더라고요. 진짜 그 국화를 땅바닥에 버리고 싶었어요. 다 시들고 잎도 다 죽은 걸 영정 사진 앞에 올려주라고 준 게…]

단원고 학부모들이 진도로 향하다 사복 경찰관들이 은밀하게 따라온 사실을 알았을 때 역시 부모들의 분노는 순식간에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안산 단원고 유가족(지난 19일) : 야 니가 XX, 안산에서 이 XXX 그렇게 하냐고. 안산X 맞아 이 XX아]

진도 팽목항에 머물던 실종자 가족들의 분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표출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서도 치료받지 못한 정신적 외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안산 단원고 유가족/(지난달 17일) : (저 안에 사람 있어 XX아 사람 있어.]

[안산 단원고 유가족/(지난달 17일) : 살려 말어. 그냥 가면 어떡합니까. 살려 말어. 그냥 가면 어떡해]

취재진이 만난 생존자와 희생자들 대부분이 세월호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성식/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요. 어제 교회를 가서 둘이 예배를 드리고 했는데 그저 멍해요. 가끔 가다가 저도 그렇고 제 처도 그렇고 왜냐하면 도대체 내가 왜 와있지? 내가 왜 여길 가야 하지?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니까. 마음의 충격이 크다 보니까.]

그런 이들에게 현실적인 고통으로 다가온 건 생계마저 제대로 이어갈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한 달에 정부에서 지급되는 보조금은 3인 가구 기준으로 88만 원입니다.

[최재영/세월호 생존자 : 시청에서 3개월 동안 3인 가족 88만 원을 지원해주는데, 누워 있어서 집에 들어가야 하는 기본적인 보험료나 이런 것도 있고.생활비도 88만 원 받아가지고 턱도 없는 얘기고…]

병원비조차 지급이 안 되고 있어 정신과 치료는 계속 받아야 하는지도 망설여지는 상황입니다.

[최은수/세월호 생존자 : 진짜 너무 힘들어요. (희생자 분들이 있어서) 말은 못하지만 우리도 어차피 살아 나와서 여기 있지만 솔직히 산 사람같이 생각도 안 들어요.]

[김영천/세월호 생존자 : (정신 치료 보상은 이뤄지고 있는게 있으세요?) 아니요 없어요. 그것도 전혀 없어요. 지금 저것 때문에 아무 이야기도 없어요. 시에서 조금 보조해주는 건 있을까마는 그거는…그것 갖고 되지도 않고.]

화물차를 싣고 가다 침몰해 이미 생계 수단마저 사라진 운전기사들은 차값에 수하물 비용, 월급까지 모두 끊겨 3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김동수/세월호 생존자 (10여명 구조) : 우리가 빚이 엄청 많은데 차도 빚이지만 화물주인들 빚도 몇천만 원이고 연락 들어오면 배상해야 되는데 지금 이 일도 터졌지 우리한텐 짐이에요.]

급기야 일반인 희생자 가족들은 정부의 대책 마련까지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장종열/세월호 일반인희생자대책위원회대표 : 유가족의 범위가 지극히 협소할 뿐만 아니라 그 대책은 형식과 일시적 방편에 그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정부 대책은 아직 부족하기만 합니다.

[한성식/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 진료를 받으라든지 그러면 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막상) 하려고 하면 계장이 과장 바꿔주고, 국장 바꿔주고 그렇게 하면 짜증이 나거든요. 가뜩이나 속에 있는 울화를 꾹 참고 있는데 전화기에다 욕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세월호 사고 희생자 가족의 심리치료를 위해 이달 초 문을 연 안산 트라우마센터.

대형 재난 이후에 트라우마 치료 센터를 별도로 마련한 건 국내에선 처음입니다.

하지만 속사정은 편치 않습니다.

상담을 맡을 정신과 전문의부터 턱없이 부족합니다.

의사 4명이 안산 지역 희생자 260여 명의 가족과 생존자, 지역 주민까지 수천 명을 담당해야 하는 겁니다.

[김해경/안산시민대책위원회 치유와공동체지원팀장 : 장비 구입이라든지 건물 임대라든지 전체적으로 집행이 지연되고 있어요.]

보건복지부가 올해 책정한 예산은 40억 원으로 인건비와 임대료만으로도 빠듯합니다.

셋방살이 신세여서 심지어 몇 개월 단위로 이사까지 다녀야할 형편입니다.

[하규섭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 센터장 : 이게 사실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추고 전문가를 확보하려고 그러면 저희들의 경우 2~3달의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 그 2~3달이라는 기간이 가장 서비스에서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에….]

미국이 9·11 테러 이후 정신건강센터에 10년간 3조 원을 지원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세월호 트라우마를 겪고 있을 피해자는 현재로선 정확한 추산조차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부의 대책이 더 치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앵커]

전문가들은 세월호 사고의 정신적 고통이 동일본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받았던 충격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의 쓰나미는 자연재해였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는 사람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참사이기 때문입니다.

탐사플러스는 쓰나미가 휩쓸고 간 현지를 찾아가 일본 정부가 참사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하고 있는지 들여다봤습니다.

[기자]

집채만 한 파도가 집과 사람을 덮치고 차들은 장난감처럼 힘없이 쓸려 내려갑니다.

2011년 3월 11일,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로 일본 동북부 해안 도시들이 초토화됐습니다.

사망자와 실종자만 1만 8천여 명. 이재민 수는 30만 명을 넘었습니다.

일본의 6개 현, 여의도 200배에 달하는 면적을 바닷물이 휩쓸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넘는 시간이 흐른 지난 13일, 취재진은 단일 지역으로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 중 하나인 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초를 찾았습니다.

피난처가 됐던 산 중턱에서 바라본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해안가로 접근할수록 쓰나미 피해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흉물스러운 철근만 남은 건물은 쓰나미 대피 방송을 했던 방재대책청사입니다.

파도가 얼마나 셌는지 두꺼운 골조가 휘어져 있습니다.

당시 이곳으로 대피했던 주민들은 대부분 실종되거나 숨졌습니다.

취재가 진행되는 동안 각지에서 온 일본인들이 청사를 향해 기도를 합니다.

[호리유 : 마지막까지 남아서 대피 방송을 하다 숨진 23살 여성 공무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공무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이 여성 덕택에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고 엔도 미키(23살)/2011년 쓰나미 당시 대피방송 : 높이 6m의 큰 지진해일(쓰나미)이 예상됩니다. 바닷물 빠지는 모양이 심상치 않습니다. 즉시 고지대로 대피해 주세요. 해안 근처에는 다가가지 마세요.]

하지만 이 건물을 보는 주민 미야카와 루미씨의 마음은 착잡합니다.

[미야카와 루미(42살) : 이 건물 2배 정도의 쓰나미가 왔었어요, 근데 한순간에 모든 집들을 쓸어버렸어요. 그 쓸어버리는 광경은 5분도 안 걸렸는데, 자동차는 물론 자동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쓸려가는 것을 봤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 당시를 뇌리에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미야카와 루미(42살) : 요즘도 가끔 그 광경이 생각납니다. 슬프네요. 도와주고 싶었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쓰나미는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사이로 언뜻 보이는 석축들.

쓰나미가 오기 전 모두 집이 있던 자리입니다.

[사사키 게이코(59살) : 여기는 친구 집이고 저희 집은 저 뒤쪽입니다.]

사사키씨는 이제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집으로 취재진을 안내했습니다.

[사사키 게이코(59) : 계단 올라와서 저쪽 부분이 현관이고, 들어와서 여기가 바로 부엌입니다. 그 다음에 부엌을 지나서 서 계시는 곳 정도가 거실이고, 그 안쪽에 일본식 침실이 2개 있었습니다.]

당시 집에 아무도 없어 화를 면했다는 게이코씨.

[그날은 원래 딸이 있는데 어린이집 선생님이기 때문에 출근을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산 위로 도망가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집과 함께 사진도, 과거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3년째 와보니 여기 수선화하고 예전에 심어놓았던 꽃이 2송이 피었더라고요.]

정신적 고통은 어떤지 물어봤습니다.

[당시 지진이 나고 40분 후에 쓰나미가 덮쳤어요. 처음 지진이 났을 때 짐을 챙기러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왔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어요.]

날이 저물 무렵, 취재진은 내부가 폐허로 변한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이 건물은 왜 이대로 남겨진 걸까.

알고 보니 쓰나미가 몰아 닥쳤던 그 시각 마을 잔치가 열리고 있던 결혼식장이었습니다.

내부로 들어가 봤습니다.

바닷물이 휩쓸고 간 탓인지 배전반 안쪽에 모래가 잔뜩 쌓여 있습니다.

창문은 산산이 부서져 창틀에 낀 유리 파편만 남았고 천장에 설치됐을 전선 줄은 모두 끊어져 어지럽게 내려와 있습니다.

건물 로비의 대형 유리문은 물론 엘리베이터 문까지 휘어진 채로 남았습니다.

이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주민들이 보존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타케야마 유카리(42살) : 다들 옷이 젖을 정도로 높은 쓰나미가 밀려왔어요. 위로 올라가 서로 부여잡고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건물로 피신해 살아남은 사람은 400여 명.

뒤에 떨어진 방재센터는 폐허가 됐지만 이 건물이 수많은 주민들의 생명을 살린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생존한 하타케야마씨도 쓰나미 이후 땅이 조금만 흔들리면 두려움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말합니다.

[하타케야마 유카리(42살) : 작은 지진이라고 해도 조금만 울리면 심장이 뛰고 울리면서 무섭고 당시 상황이 떠올라서 두렵습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도 사실은 무섭습니다.]

희생자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 취재진은 쓰나미로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일종의 임시주택인 가산주택 단지로 향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피해자들의 현재 상태는 어떨까.

취재진은 쓰나미로 남편이 실종된 69살 스가와라 쓰르요씨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스가와라씨는 찬찬히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나갔습니다.

[스가와라 쓰루요(69살) /쓰나미 당시 남편 실종 : 절대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초등학교를 돌아갔는데 집 자체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걸 본 순간 머릿 속이 하얘진다는 게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어서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고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스가와라씨는 3년을 하루같이 식사를 차립니다.

[스가와라 쓰루요(69살) /쓰나미 당시 남편 실종 :매일 아침 식사를 올리고 그럴 때 종을 치거든요. 그러면서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빨리 돌아와 달라고, 시신이라도 빨리 위로 나와달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요.]

스가와라씨에게 3년이란 시간은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스가와라 쓰루요(69살) /쓰나미 당시 남편 실종 : 매일같이 두드리고 많이 드시고 성불하시라고 빨리 돌아오시라고, 그런데도 아직도 찾을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깝죠.]

아직 심리 치료를 받아본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스가와라 쓰루요(69살) /쓰나미 당시 남편 실종 : 어떻게 보면 다른 분들은 더 힘든 생활을 하셨는데 저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 나약한 마음 갖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상담을 받아본 적은 없고요.]

또 다른 가산주택에 살고 있는 미우라씨는 쓰나미 때 조카를 잃었습니다.

미우라씨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취재진에게 조심스레 털어놓았습니다.

[미우라 유(45살) : (가족들을 기다리면서) 가장 친했던 친구의 시신을 목격해야 했고, 그런 것에 대한 불안감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4일 동안 가족들을 전혀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지금도 불안합니다. 저 스스로 생각할 때 아직까지 트라우마가 있다고 생각해요.]

간호사였기에 사고 초기 정신과 의사들의 치료 모습도 많이 봤다고 합니다.

[미우라 유(45살) : 임상치료사나 정신과 의사 분들이 오셨을 때 그분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광경을 목격했어요. 전문가의 치료는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희생자 가족들이 아직도 겪고 있는 심리적 고통에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취재진은 먼저 야마모토초의 지역포괄지원센터를 찾아갔습니다.

때마침 상담 직원들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세이타 후미/야마모토초 지역포괄센터 직원 : 피해자 분들을 그룹으로 나눠서 접근해 보면 더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지역포괄지원센터는 야마모토초 주민 1만3천여 명 가운데 쓰나미 피해자 1700여 명의 건강, 심리 치료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지원 활동은 크게 3분야로 나눠 이뤄집니다.

[시부야 미치코 / 야마모토초 지역포괄지원센터소장 : 한 가지는 살롱 사업, 피해 주민 분들이 모여서 얘기도 하고, 두 번째는 배식 서비스, 세 번째는 방문 서비스가 있습니다. 개별 방문을 통해서 건강 체크도 하고 심리적인 치료도 거기서 합니다.]

1대 1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포괄지원센터는 다시 그 밑에 여러 곳의 서포트센터를 두고 있습니다.

서포트센터는 바로 가산주택 단지 안에 있었습니다.

민간 기관에 위탁해 서포트센터를 운영하게 하고 지역포괄센터가 관리하는 방식.

노인들이 많았는데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밖으로 많이 나오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스즈케 요우이치/ 야마모토초 서포트센터 살롱 직원 : 먼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밖으로 안 나오시고 혼자 안에 계시고, 그러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런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모시고 나올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1대 1 상담도 이곳을 통해 이뤄집니다.

[이토 토모코 /야마모토초 서포트센터 방문상담 직원 : 사람들마다 다 다른데 제일 인상 깊은 건, 가족을 다 잃고 혼자 계신 분들은 너무 쓸쓸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개별 면담을 중요시한 건 상태를 세심히 살펴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부야 미치코 /야마모토초 지역포괄지원센터소장 : 개별 면담이 기본인데요. 면담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체크하거나 계속적인 면담을 통해서 상태가 조금 더 악화되는 분들은 병원으로 소개를 하고…]

일본 정부의 이같은 심리 치료 지원은 과거의 뼈아픈 경험에서 만들어 진 겁니다.

[오가사와라 코이치 /일본 개호경영학회 부회장 : 고베에서 똑같이 시설을 중심으로 복구하려고 했습니다. 복구는 상당히 잘 됐어요. 그런데 문제는 마음, 심리적인 치료 이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쓰나미 사고 초기부터 심리 치료 전문가를 대거 투입했습니다.

[오가사와라 코이치/일본 개호경영학회 부회장 : (쓰나미가 발생한) 3월 11일부터 1년간 3500명 이상의 전문가가 각지에 파견돼서 치료를 했다는 것입니다.]

초기 대응이 빨랐지만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너무 많은 전문가가 한꺼번에 들어가 혼선을 초래했다는 반성이었습니다.

[와타나베 스미오/일본 동북복지대 심리학과 교수 : 당시 트라우마 상태를 거친 다음에 PTSD, 즉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같은 것들이 올 거라고 예상을 해서 많은 전문가들이 들어갔습니다. 근데 너무 많이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얘기를 듣고 하니까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가 됐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일본 정부는 다시 1년 4개월여에 걸쳐 대응 방안을 재검토했고 그 결과 후생노동성이 올해 1월 DPAT(Disaster Psychiatric Assistance Team)라는 재해파견정신의료팀을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재난이 발생하면 72시간 내 참사 현장에 들어가 재해대책본부의 지휘 하에 수개월 동안 활동하게 됩니다.

[오가사와라 코이치/일본 개호경영학회 부회장 : 후생노동성이 초기에 민간 전문가들을 모아 '애프터서비스 추진실'을 만들어서 재난 직후 초기 대응에 대한 전반적인 검증을 했습니다. 디팻(DPAT)이라고 하는데, 재해 의료를 주로 담당하는 곳인데, 재난에 의해 발생하는 정신적 외상에 대한 치료를 전문적으로 하는 기구를 만든 것이죠.]

일본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심리 치료 정책을 입안할 때 조정 기구를 둘 것부터 조언했습니다.

[와타나베 스미오/일본 동북복지대 심리학과 교수 : 쓰나미가 생기고 반 년에서 일 년 지난 뒤에 상황이 정리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 방향도 잡히고 어느 정도 정리가 가능해졌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심리 치료를 위해서는 전문 조정 기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또 현재 피해자들의 심리는 극도의 흥분 상태일 수밖에 없다며 곧 이어질 좌절감 등 2차 피해에 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와타나베 스미오/일본 동북복지대 심리학과 교수 : 한국도 이제 한 달이 지나고 있는데 처음 재난이 일어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흥분상태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공포감 같은 게 몰려오고 나중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책감이 슬픔과 분노로 나타나서 결국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심리 치료 예산을 더 늘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일본 공무원들.

[시부야 미치코 / 야마모토초 지역포괄지원센터소장 :3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경우 계속지원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 마음이 약했던 분들은 문제가 계속 나타날 수 있어서 포괄적으로 치료를 해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앵커]

오늘 탐사플러스는 세월호,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전해드렸습니다. 세월호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고통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생존자들 역시 숨죽여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지난주 초부터 우리 정부는 세월호 참사 대책을 줄줄이 내놓고 있습니다. 해경을 없애겠다고 했고, 관피아 척결 방안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표가 이어지는 가운데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에게 무언가 해주겠다고 말하기 이전에 직접 그들이 되어 보려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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