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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플러스 7회] 숭례문 부실 공사와 엘리트 교수의 죽음

입력 2014-03-3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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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국보1호 숭례문. 불이 나서 다 타버렸을 때 못지않게 국민들 마음을 멍들게 했던 게 바로 부실공사였죠. 지난주 그 부실 공사에 대한 수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신응수 대목장 등 24명이 입건되면서 일단락됐는데요, 아직 우리가 풀지 못한 숙제가 있습니다. 바로 숭례문 의혹을 조사하던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인데요, 탐사플러스가 의문의 죽음 뒤에 감춰진 진실을 추적했습니다.

박성훈 기자입니다.

[기자]

찬 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7일.

전라도 작은 산사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49재 추모제를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 함께 합장 부탁드리겠습니다.]

목탁 소리가 퍼집니다.

한평생 나무만 연구하다 갑자기 생을 마감한 그의 영정 앞에서,

[고 박원규 교수 부인 : 당신은 진짜 용기 있는 사람이었고 순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어요.]

아까운 학자의 급작스런 죽음은 아마도 6년 전에 일어난 어이 없는 방화가 불러온 비극일 것입니다.

2008년, 국보 1호 숭례문이 한 시민의 방화로 잿더미가 됐습니다.

3만 5천명의 인원과 27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대공사 끝에 지난해 성대한 복구식이 열렸지만 기쁨도 잠시, 복구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부실 공사 논란이 터졌습니다.

연꽃 모양의 단청이 쩍쩍 갈라졌고 숭례문 공사를 총괄한 신응수 대목장의 목재상이 경찰에 전격 압수수색 당합니다.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고 박원규 교수.

그는 숭례문 부실 의혹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바로 그 시점에 숭례문 목재에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는 일을 맡았던 학자였습니다.

토요일이던 지난 1월 18일 오후, 박 교수가 집에서 나간 지 몇 시간 만에 자신의 대학 구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주말에도 늘 학교에 나가서 연구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박OO/고 박원규 교수의 장녀 : 교외 나가서 같이 점심 먹자고 약속을 한 거죠. (그런데) "나 잠깐 학교 갔다 올게" 해서… 그래서 얼른 갔다와 이렇게 보낸 거죠.]

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뒷모습이었습니다.

숭례문 부실 의혹 조사를 맡은 당사자가 갑자기 숨지자 언론은 앞다퉈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외압이 있었는지, 죽음의 배후가 있는 건 아닌지 추측이 쏟아졌고, 경찰이 조사까지 벌였지만 끝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담당 경찰/청주 흥덕경찰서 : 한 달 동안 통화내역을 뺐거든요. (근데) 이상하리만치 다른 분들은 통화내역이 거의 없어요.]

JTBC는 박 교수가 숨지기 하루 전날, 마지막으로 그를 인터뷰했던 언론이었습니다.

혹시 통화 내용에 단서가 있지는 않을까.

'탐사플러스'는 의문을 밝히기 위해 전화 인터뷰 내용을 다시 검토해 봤습니다.

당시 취재진은 박 교수에게 숭례문 목재의 검증 결과를 물었습니다.

[고 박원규 교수 (1월 17일, 마지막 인터뷰) : 준경묘(금강송) 채취가 아님이 유력한 것으로 2개, 5개는 판단 불가가 되겠습니다.]

문화재청이 강원도 삼척 준경묘에서 벌채해 숭례문 공사에 기증한 국내 최고급 금강송이 2곳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중요한 조사 결과였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에 따라 숭례문 목재를 담당한 신응수 대목장이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는 상황, 그래서인지 박 교수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고 박원규 교수 (1월 17일, 마지막 인터뷰) : (그러면 나무(금강송)가 안 쓰인 곳은 어디 어디인지?) 그건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 드리면 다른 조사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박 교수는 숭례문 조사를 의뢰한 문화재청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듯 했습니다.

[고 박원규 교수 (1월 17일, 마지막 인터뷰) : 예, 지금 정확한 것을 지금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고요. (문화재청에서는 뭐라 그러나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 심사숙고하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고 박원규 교수 (1월 17일, 마지막 인터뷰) : 아, 촬영을 해서요? 네,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사진은 못 보내드릴 것 같아요.]

결국 더 이상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하고 마쳐야 했습니다.

[고 박원규 교수 (1월 17일, 마지막 인터뷰) : (궁금한 게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이후 그날 저녁까지 박 교수와 취재진 사이에 몇 차례 통화가 더 오고 갔지만 보충적인 질문과 일반적인 답변들이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지난 1월 17일 JTBC 뉴스9을 통해 보도됐습니다.

당일 밤, 박원규 교수는 가족과 함께 JTBC 뉴스를 시청했다고 합니다.

[박OO/고 박원규 교수의 장녀 : 그날 인터뷰하고 와서 9시 뉴스 같이 시청하고, 그리고 나서는 오히려 되게 잠잠한… 별 말씀 없이….]

경찰 조사 결과 숨진 당일 학교 CCTV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박 교수의 모습만 남아 있었습니다.

문화재청 역시 사태의 원인을 짐작조차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윤순호/문화재청 대변인 : 저희들도 박 교수님 돌아가신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희들도 알기가 어려운 상황이고요.]

도대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걸까.

취재진은 다시 박원규 교수가 근무한 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을 찾았습니다.

박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을 규명하려는 취지를 설명한 뒤 동료 교수와 연구진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규성/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 : 해왔던 일들이 그 분이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많은 분들께 알려드리고 싶고….]

고 박원규 교수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목재 연륜 분석을 도입한 과학자였습니다.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90년 충북대 조교수로 임용됐고, 나이테 연대 측정 연구로 지난 20여 년간 각종 문화재 연대를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850년 간의 국내 소나무 나이테 데이터를 축적해 국내 유일의 목재연륜소재은행을 설립했습니다.

[고 박원규 교수 (지난해 11월, 목재연륜소재은행 5주년 기념 심포지움) : 유럽은 2만 년 전까지 돼 있기 때문에 그 작업을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겠습니다.]

1860년 중건됐다던 경복궁 신무문은 박 교수의 나이테 조사를 통해 1870년 중건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문헌으로 재확인되는 등 그의 나이테 분석 연구의 엄밀함은 학계의 큰 호응을 얻어 왔습니다.

그런 그가 숭례문 목재에 대한 의혹을 풀 연구를 맡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숭례문 조사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던 걸까.

연구진에게 숭례문의 목재를 검사한 방법과 동일하게 실험해봐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나무를 드릴로 뚫자 연필 모양의 가는 목재가 뽑아져 나옵니다.

이 목재심을 기계로 평평하게 깎아내니 핵심부에서 표면까지 나이테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 샘플을 육안이 아닌 현미경으로 관찰해 1/100mm까지 나이테의 간격을 측정하는 겁니다.

[정현민/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 연구원 : 11번째 나이테 같은 경우에는 2.4mm, 나무의 생장량이 좀 더 줄어든 거죠.]

설악산 4곳에서 채취한 소나무 나이테를 보면, 나이테 길이 변화가 거의 일치하지만 속리산에서 난 소나무의 나이테는 다릅니다.

같은 방식으로 고 박원규 교수는 숭례문에 사용된 목재가 강원도 삼척 준경묘 금강송의 나이테와 같은지 비교해 결론을 내린 겁니다.

[한규성/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 : 데이터라든가 그런 것들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거기에 거짓이라든지 이런 게 섞이지 않아요.]

[앵커]

사건을 취재한 박성훈 기자와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박 교수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기자가 박성훈 기자인 셈이죠?

[기자]

네, 맞습니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박 교수의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원인을 밝혀보고자 하는 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취재를 하게 됐습니다.

[앵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박 교수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짐작이 잘 안 되는 데요?

[기자]

예, 제가 인터뷰를 수차례 다시 들어보고, 주변 취재도 많이 했지만 그럴수록 더 미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박 교수의 통화내역을 입수하면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함께보시죠.

촉망 받던 학자가 죽음을 택한 이유는 끝내 묻히고 마는 걸까.

짙은 안갯 속 같던 의문에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한 건 고 박원규 교수의 통화 목록을 입수하면서부터입니다.

박 교수가 숨진 것은 지난 1월 18일 토요일.

이날의 통화 기록은 모두 4통이었고, 이중 박 교수가 받은 전화는 집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날, JTBC를 비롯해 여러 언론의 전화가 걸려 왔었고, 문화재청 수리기술과 사무관의 전화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화 목록을 검토하던 취재진은 박 교수가 국회의원 출신의 한 변호사와 여러 차례 통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해당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알고 보니 변호사는 박 교수와 충북 영동중학교를 같이 나온 동창이었습니다.

이 변호사는 뜻밖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심규철/변호사, 전 16대 국회의원 : 갑자기 전화가 와서 상담할 내용이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자기가 숭례문 복원 공사 관련해서 지금 의혹을 받고 있다.]

박 교수가 심 변호사를 만난 건 숨지기 12일 전인 지난 1월 6일.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수사관이 박 교수의 대학을 찾아가 조사를 하고 간 사흘 후였습니다.

[심규철/변호사, 전 16대 국회의원 : 신응수 대목장과 연결고리가 있는가, 본인이 이런 의혹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부탁을 받고 그런 일을 한 건 결코 아닌데…]

당시 경찰이 조사한 건 박 교수가 숭례문 기증목에 대해 했던 연구 결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2011년, 박 교수는 문화재청의 요청으로 숭례문 목재에 대한 연륜 연대 측정 작업을 벌였습니다.

조선 태조와 세종, 1860년대 등 숭례문 재건 때 교체된 목재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때 문화재청이 국민 기증목 388본의 재료적 특성을 평가해달라고 함께 요청했고, 박 교수는 수장고에서 기증목을 둘러보고 이중 5본의 나무를 골라 샘플 조사를 했습니다.

샘플 기증목이 모두 문화재 표준 시방서의 강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나왔고, 자문위원회에서도 같은 평가를 거쳐 문화재청에 최종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가 문제가 된 겁니다.

심규철 변호사에 따르면, 박원규 교수가 기증목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서를 썼기 때문에 신응수 대목장이 기증목을 쓰지 않고 자신의 목재를 사용한 건 아닌지, 즉 기증목을 빼돌린 범행을 공모한 게 아닌지 경찰로부터 의심 받았다는 겁니다.

[심규철/변호사, 전 16대 국회의원 : 수사관들이 당신이 다 뒤집어쓸 수 있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기증목을 축소 조사해 신 대목장의 기증목 횡령을 도왔다는 것.

박 교수는 본인이 의혹의 대상이 됐다는 생각만으로도 괴로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규철/변호사, 전 16대 국회의원 : 적당히 남을 봐주고 대가관계에 연루되고 이런 친구는 아닙니다. 그런 의혹의 대상이 되니까 경찰이 자꾸 불러대고 수사대상이 되니까 많이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 1월 11일과 13일, 박 교수는 경찰청에서 두 번의 참고인 조사를 더 받았습니다.

심 변호사는 당시에도 박 교수의 심리가 매우 불안해 보였다고 털어놨습니다.

[심규철/변호사, 전 16대 국회의원 : 며칠 후에 제 사무실에 오기로 돼 있었는데 굉장히 불안해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오늘 올라가려고 했는데 못 올라가겠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연구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요정/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 박사 : 너무 오명이잖아요. 뒷돈 받고 뭐 한 것 같이 그런 거에 휩쓸리면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얘기해도 누가 그걸 믿어주겠어요. 그런 걸로 막 휩쓸려서 당신이 이제는 아무 것도 못 보시더라고.]

그렇다면 박원규 교수에게 정말 문제는 없었을까.

경찰이 의문을 제기한 첫 번째 이유인 국민기증목 388본 가운데 상대적으로 상태가 나쁜 기증목 5본만 조사한 이유를 확인해 봤습니다.

당시 박 교수가 방문했던, 기증목이 보관된 수장고 모습입니다.

기증목 중 상태가 좋은 것은 숭례문 사용 위치가 표시돼 있습니다.

1차 선별이 끝난 상태에서 남은 나무에 대해 조사를 벌인 겁니다.

[김요정/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 박사 : 쓸 만한 것들에는 '부재'라고 적혀 있어서 쓸 거다라고 하는 게 있고 안 쓸 거는 X 표시가 돼 있었어요.]

연구진은 무엇보다 기증목을 평가할 때 상태가 안 좋은 나무로 실험해야 공사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김요정/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 박사 : 가장 나쁜 것을 기준으로 갖고 와서 나머지들은 그 이상일 거라고 얘기를 해야 올바른 해석이잖아요.]

문화재청에 확인해 봤습니다.

문화재청은 박 교수의 연구에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윤순호/문화재청 대변인 : 지침 상에는 몇 본을 써라 이런 건 없었고 연구가 문제 된다고 얘기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경찰은 기증목 평가 결과와 관련해 박 교수를 조사한 것은 맞지만 수사 과정에서 기증목 연구 과정 등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였을 뿐이었다고 밝혔습니다.

또 '박 교수가 뒤집어쓸 수 있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는 것은 조사 기록에 남아 있지도 않을 뿐더러 해당 수사관이 그런 표현을 쓴 사실이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7일, 경찰은 숭례문 의혹 수사 최종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송병일/경찰청 지능범죄수사과장 : S 대목장이 숭례문 복구용 국민기증목 154본을 횡령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54본 가운데 일부는 경복궁 복원 공사에 사용됐고, 신응수 대목장이 맡은 울산 태화루 공사에도 쓰였습니다.

신응수 대목장은 이런 내용을 보고받지 못했기 때문에 몰랐다는 해명을 했다고 경찰은 전했습니다.

숭례문 의혹이 일단락 된 지난 29일, 고 박원규 교수가 안장된 납골당.

박 교수의 딸이 영정 사진을 보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립니다.

[박OO/고 박원규 교수의 장녀 : 지금은 아빠의 죽음이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얘기가 되고 있는데 정말 자기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셨고 열심히 하셨기 때문에 그런 길을, 그렇게 되셨다는 걸….]

[김요정/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 박사 : 이 기증목이 그야말로 함정이었어. 조금만 기다리셨으면 이런 일들이 이렇게 해결이 되잖아요. 그럼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아실 텐데 너무 서둘러서 가신 거지.]

[이융조/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 아니, 우리 현실이 어떻게 됐길래 이런 일이 있는지. 옆에서 도와주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지요. 미안하기도 하고…]

자신의 연구업적을 친절하게 설명하던 박 교수.

[고 박원규 교수 (1월 17일, 마지막 인터뷰) : 좁고 넓은 나이테의 너비를 그래프로 그려서 비교하고 통계적인 분석도 하고….]

우린 이제 이 목재학자의 설명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앵커]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그 진정한 이유는 이제 누구도 알 수 없게 됐지만 박 교수가 겪었을 심적 압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교수의 죽음에 우리 사회의 책임은 과연 없는지 생각해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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