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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청주 지게차 사고에 드리운 세월호 그림자

입력 2015-08-21 11:43 수정 2015-08-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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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청주 지게차 사고에 드리운 세월호 그림자


1년 전 난 진도의 팽목항부터 부산과 제주의 항구들, 그리고 순천의 매실밭에서 여름 대부분을 보냈다.

세월호 유가족과 선원, 생존자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유병언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팽목항에서 만난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에서 내 머리와 가슴에 "왜?"라는 의문 부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왜?" 3등 항해사가 거친 맹골수도에서 키를 잡았을까부터,
"왜?" 세월호는 복원력을 잃었을까,
"왜?" 이준석 선장과 기관사들은 안내방송을 하지 않고 아이들을 버렸을까,
"왜?" 해경은 침몰하고 있던 세월호를 향해 탈출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세월호 전 항해사의 육성 증언, 침몰 당시 해경 촬영한 동영상, 차디찬 바다에서 건져낸 단원고 아이들의 휴대전화에서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노후된 세월호는 무리한 증축과 과적, 부실한 안전관리로 침몰이 예견돼 있었고 단원고 아이들을 포함한 304명의 탑승객들은 현장에서 해경의 판단 착오와 정부의 구멍뚫린 안전시스템에 결국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취재수첩] 청주 지게차 사고에 드리운 세월호 그림자


1년이 지난 올해 여름, 난 청주의 한 화장품 공장에서 다시 세월호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됐다. 지게차에 치여 숨진 공장 노동자 이모 씨의 죽음에서였다.

이씨의 억울한 죽음은 이미 지역 매체들에 의해 알려져 있었다. 지난해 말 제2롯데월드에서, 올초 부산 한 공사 현장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사회부 기자에게 어떻게 보면 낯익은 산업재해 은폐 사고였다.

하지만 이씨의 유족과 동료를 만나며 세월호 침몰 이후 한동안 잊고 있던 "왜?"라는 의문 부호가 다시 켜졌다.

"왜?" 지게차 운전사는 자재관리를 했던 이씨를 쳤을까부터,
"왜?" 업체는 이미 출동한 119를 돌려보냈을까,
"왜?" 30분 거리의 지정병원을 가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을까.

유족과 함께 들여다 본 CCTV에서 그 대답이 조금씩 보였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주역들은 청주 화장품 공장의 CCTV에서 고스란히 등장했다.

고박도 없이 화물을 실었던 세월호 대신, 아무 데나 화물들을 야적한 화장품 공장이 무대였다. 과적했던 세월호 대신,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짐을 쌓아둔 지게차가 등장했다.

팬티 바람으로 뛰쳐나오던 선장은 에어컨이 나오는 지게차에서 보지도 듣지도 않고 과속한 운전사로, 사고 직후 해경이 아닌 청해진해운에 전화했던 1등 항해사는 상사에게 보고하며 119를 돌려보낸 관리직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살아날 거라며 굳게 믿고 객실에서 기다리던 아이들 대신, 공장 맨바닥에 누워 20분 넘게 고통을 호소하던 이씨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가는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안내방송처럼 내장이 손상된 이씨에겐 모포와 우산만이 가리워졌다.

300명이 넘는 승객을 두고 도망간 선원들 대신 출동한 119를 돌려보내고 다리가 부러진 이씨를 들것도 없이 회사 승합차에 실은 직원들이, 민간구조업체에게 구조를 맡긴 해경처럼, 정형외과였던 지정병원에 내장 파열된 이씨를 맡겼다.

하지만 그사이 골든타임은 사라졌고 304명의 세월호 탑승객들처럼 이씨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번 사고는 CCTV가 아니었다면 묻혀버릴, 그리고 이를 본 유족의 문제 제기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에 '단순 찰과상'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 CCTV를 보고서도 경찰은 청주 지게차 사고 유족에게 단순 교통사고라며 합의를 권했고, 지방 노동청은 해당 업체가 수백만원의 벌금을 내는 데 그칠 것이라 유족에게 말해줬다.

CCTV를 봤다는 이 회사 안전관리 담당자는 취재진에게 "현장에서 판단 착오가 불러일으킨 사고"라고 말했다. "왜?" 현장에서 판단 착오를 했는지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세월호 이후 안전불감증에 있어 조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달라졌다고 생각한 건, 그리고 믿고 싶었던 건 착각이었다.

▼ [영상으로 보기] 단독 ㅣ지게차에 치여 직원 죽어가는데…119 돌려보내


손용석 사회2부 기자 son.yongseok@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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