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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입력 2019-10-15 22:05 수정 2019-10-1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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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오해라는 허울의 폭력 속에서 허우적대며 생의 가장 빛나는 계절을 흘려보냈다"

후배 작가들은 1920년대를 살아간 작가 김명순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그는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였지만 평생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의 세상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소문과 억측에만 집중했습니다.

"정조 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연실이…모성애라는 것도 결핍…부끄럼에 대한 감수성은 적게 타고난 사람…"
- 김동인 < 김연실전 >

그는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롱당했고, 잔인한 성폭력의 피해자였으나 오히려 방종한 여자로 취급되서 당대의 어느 인기 작가는 김명순을 비하하는 소설까지 연재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김명순은 방정환과 차상찬을 명예훼손으로 고소…자신에 대해 성폭력을 가하는 기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
-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

'더러운 여자' '남편 많은 처녀'로 낙인찍혀 마감된 작가의 삶.

"그러나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멋들어진 말을 앞세워 아무 데나 칼부림을 해대는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 김별아 < 탄실 >

견디지 못한 그는 자신을 모욕해온 이들을 고소했지만 싸움은 맥없이 마무리되었고…

쓸쓸히 잊혀져간 그가 유언처럼 세상에 남긴 시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아…이 사나운 곳아"
- 김명순 < 유언 >

반짝이는 스물다섯의 젊음.

그에게도 오늘의 세상은 사납고 또 '사나운 곳' 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익명의 숲에 숨어서 책임 없이 난사하는 잔인한 가해는 연예인, 특히 여성에게 더욱 가혹해서 끊임없는 생채기를 만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악플을 달았던 또래의 청년을 감싸고자 했습니다.

"악플러지만 동갑내기 친구를 전과자로 만드는 게 미안해서…"
- 설리

그러나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보면서 그는 혹시 후회하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잃어버린 "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과, 잃어버리고 나서야 후회하는 세상의 미련함은…

늘 그렇듯, 뒤늦습니다.

100년 전, 1920년대를 살아간 작가는 약자에게 가혹한 시대를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아…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학대해 보아라…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 김명순 < 유언 >

다음의 세상에서는 무언가 달라지길 소망하는 역설적인 외침.

1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는 그때로부터 얼마나 달라졌을까…나아지긴 했나…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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