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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면]2011년 손흥민이 없었다면 2022년 손흥민은 있었을까.

입력 2022-06-02 06:00 수정 2022-06-02 06:01

2011아시안컵 직후 "손흥민은 끝났다"...그 말이 손흥민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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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아시안컵 직후 "손흥민은 끝났다"...그 말이 손흥민을 바꿨다

6월, 한국 축구의 주어는 손흥민입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누구나 믿을 수 없는 성취에 들떠있죠. 아름답기만 했던 골 뿐만 아니라 그의 말, 심지어 그의 옷까지, 모든 게 주목받습니다.
그래도 “우승은 단지 어제 내린 눈일 뿐”이라던 네덜란드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말이 떠오릅니다. 냉정을 찾으려는 손흥민의 모습에서. 국가대표팀에 돌아와서 던진 말은 이렇습니다.
“네이마르는 세계 최고의 선수지만 저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지난 3월 이란과 월드컵 최종예선전, 손흥민은 골을 넣고 포효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지난 3월 이란과 월드컵 최종예선전, 손흥민은 골을 넣고 포효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6월은 오로지 국가대표의 시간입니다. 보름간 소집돼서 4번의 평가전을 치르는 것도 좀처럼 없었던 일입니다. 손흥민에겐 또 다른 기념비가 기다립니다. 2경기만 더 뛰면 A매치 100경기에 다다릅니다. 100년을 훌쩍 뛰어넘은 우리 축구 역사에서 15명에게만 허락된 '센추리 클럽'입니다.

100경기에 다가선 손흥민,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잘했기에 '당연한 성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듯,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국가대표로 부름을 받았던 처음이 지금의 손흥민을 만들었습니다. 손흥민의 첫 대표팀 기억을 들춰봤습니다.
 
2011 아시안컵을 앞두고 손흥민은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됐습니다. 룸메이트 박지성은 "네가 한국축구의 미래다"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사진=연합뉴스)2011 아시안컵을 앞두고 손흥민은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됐습니다. 룸메이트 박지성은 "네가 한국축구의 미래다"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조광래 감독의 선택 속에 2010년 12월 처음 발탁된 국가대표, A매치 데뷔전은 시리아와 평가전이었습니다. 후반 교체 멤버로 45분을 뛰었습니다. 곧바로 이어진 이듬해 1월 아시안컵에서도 역할은 같았습니다. 후반전 흐름을 바꾸는 조커였습니다. 꿈에 부풀었던 아시안컵 첫 경기, 바레인전도 나섰습니다. 그러나 교체로 들어가선 22분 만에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갑자기 수비수 곽태휘가 퇴장당하면서 전술적으로 공격수 한 명을 빼야 했는데 그게 손흥민이었습니다. 아쉬운 아시안컵 첫 경기, 그래도 이어진 인도전에선 A매치 데뷔골을 낚았습니다.
일본과 4강전은 우리 축구에 쓰디쓴 기억으로 남아있죠. 손흥민도 그렇습니다. 혈투였던 승부, 손흥민은 후반 막판 교체 투입돼 연장전, 승부차기까지 함께 했습니다. 승부차기에선 4번째 키커, 그러나 그의 차례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3명의 키커가 모두 실축하면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지고 펑펑 울었던 열아홉살 손흥민의 눈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2011 아시안컵이 끝나고 일단 한국에 들어가기로 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몰랐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취재진과 팬을 본 적이 없었다.
(손흥민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소년은 한껏 들떴습니다. 그러나 호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지 손웅정 씨가 내놓은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흥민이가 성인무대에서 제대로 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 것은 그때였다.
(손웅정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손흥민은 어린 나이에 아시안컵에서 A매치 데뷔골도 넣고 또 쓰라리긴 했지만 큰 경기에 나서며 경험을 쌓았습니다. 화려한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떠안아야 했던 게 컸습니다. 너무 어렸기에 몸 관리에 소홀했습니다. 무엇보다 먹는 것을 조절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아시안컵에 차출돼 교체로 몇분씩 뛰었지만 풀타임을 뛴 선수처럼 야식까지 챙기며 식사를 했고, 한 달 사이 몸무게는 4kg이 불었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흥민이의 몸은 무거웠고 경기력은 바닥이었다. 성적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구단 스태프들과 팬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손흥민은 끝났다.”
(손웅정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2011년 6월입니다. 손흥민은 아버지 손웅정 씨와 함께 매일 1천개씩 슛을 하는 훈련을 이어갔습니다. (사진=연합뉴스)2011년 6월입니다. 손흥민은 아버지 손웅정 씨와 함께 매일 1천개씩 슛을 하는 훈련을 이어갔습니다. (사진=연합뉴스)

그렇다면 이런 우려를 어떻게 걷어찼을까요. 여기서 '하루 1000개의 슛' 일화가 나옵니다.
2010~2011시즌이 마무리된 2011년 6월, 입에서 단내 나는 하루하루가 시작됐습니다.

(귀국) 다음 날부터 나는 죽었다. 아침 8시에 밥을 먹고 아버지와 함께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는 뒷산의 높다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이트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축구공 20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위치를 옮겨가면서 슛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일 1천 개씩. 그렇다 1천개다. 같은 골문을 향해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 슛을 때렸다. 내가 슛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슈팅은 2011년 여름 지옥훈련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손흥민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그리고 11년이 흘렀습니다. 다시 6월입니다.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라는 이름으로 6월의 국가대표와 함께합니다.

첫 국가대표에 발탁됐던 2010년 12월, 손흥민의 룸메이트는 박지성이었습니다. 박지성이 손흥민에게 던진 말은 “네가 한국 축구의 미래다”였습니다. 11년이 지나 손흥민은 '한국축구의 현재'가 됐습니다. 그 과정엔 '천재적 재능'이나 '엄청난 행운'은 없습니다. 성취와 실패, 그 반복되는 패턴에서 무게중심을 잡던 시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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