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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죽지 않고 운동할 권리를 묻다

입력 2020-07-18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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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죽지 않고 운동할 권리를 묻다

# 메달은 여전히 빛났지만 주인은 없었습니다.

경북 칠곡에서 지난 2일 만난 고 최숙현 선수 오빠는 메달 세 개와 공책 한 권을 보여줬습니다. 네 살 아래 동생의 발인이 사흘 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오빠는 지친 아버지 대신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작은 농촌 마을, 인터뷰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역 앞 벤치에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오빠가 내놓은 공책은 훈련 일지였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꽉 채운 훈련 내용이 빼곡했습니다. 2시간 넘게 수영·사이클·마라톤을 이어 하는 극한의 경기…. 승부는 1초 이내에 갈립니다. 찰나의 기록을 앞당긴 날 최 선수는 'Best'라고 적고 엄지 모양을 그려넣었습니다. 그러나 일기엔 뿌듯함 대신 괴로움이 적혔습니다. '제발 숨쉬게 해 줘''그만하고 싶다'…일기를 보여준 오빠는 "혹시나 밝혀지지 않은 상처가 있을까봐 두렵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 "그 선수 앞에서 저희는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검은 티셔츠에 반바지, 운동복 차림의 두 선수는 국회 단상에 올라 떨리는 목소리로 회견문을 읽어내려갔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고, 앳된 얼굴들은 땅바닥만 바라봤습니다. 겨우 회견장을 빠져나가는 선수들, 뒤쫓던 기자들도 금방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동료를 위해 힘들게 용기냈을 그들에게 더는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경주시청팀을 거쳐간 선수들은 2013년부터 따져도 고작 27명. 전국 실업팀 선수를 다 세어봐도 철인3종 선수는 10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작은 세계인지…. "감독과 특정 선수만의 왕국이었다" "그것이 운동선수들의 세상이고 사회인 줄 알았다" 회견문이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최숙현 선수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지 20여 일이 지났습니다. '그 사람들'의 가혹행위는 녹취로, 또 증언으로 하나씩 드러났습니다. 최 선수의 죽음을 취재진에게 처음 알린 건 한 철인3종 동호인이었습니다. "누가 막고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나 세상이 무심하다"며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남긴 증거, 가조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눈앞에 하나둘 드러나는 폭력의 실체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이빨 깨물어, 이리와, 뒤로 돌아" "나한테 두 번 맞았지? 넌 매일 맞아야 해" 지난해 3월 뉴질랜드 전지훈련에서 최 선수가 녹음한 파일 속 '팀닥터'의 발언입니다. 녹취록 곳곳에 '퍽, 퍽, 퍽' 세 글자가 적혔습니다. 음성 파일 속 '퍽, 퍽, 퍽' 소리는 듣는 사람마저 눈을 질끈 감게 만들 만큼 둔탁했습니다. 이걸 시청자에게 들려줘도 될까 고민도 많았습니다. 방송에 나간 대목은 극히 일부입니다. 33장의 녹취록에 빼곡히 담긴 가혹행위의 현장. 최 선수는 울먹이고, 훌쩍이며 "죄송합니다"란 말만 10번 넘게 반복했습니다. 가족은 평소 감독과 팀닥터, 선배의 폭력에 힘겨워하자 녹음을 권했다고 했습니다.

# "모르는데 뭐라 하죠?"

어렵게 증거를 확보했지만, 아무도 최 선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최 선수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날, 취재진은 경주시체육회에 제보를 확인하게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체육회 직원은 "이미 다른 팀에 간 선수라 모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모르는데 뭐라 하죠?" 다른 직원에게 건네는 말까지 수화기 너머로 들렸습니다. 사건이 불거진 뒤 시청의 반응도 황당했습니다. 경주시장은 "팀을 해체하겠다"고 페이스북에 썼다가 "책임감 없다" 비난이 쏟아지자 글을 '친구공개'로 바꿨습니다. 담당 팀에 민원을 덮어버린 게 아닌지 물었을 땐 감독과 선수들이 전지훈련에 나가 있어 전화로 연락을 했다고, 조사를 안 한 게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돼 더이상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경주시체육회 내규에 '수사 중에 있다 해도 사유가 충분히 인정되면 징계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는데 말입니다. 돌아오는 답변들에 당사자가 아닌 저도 순간순간 허탈함을 느꼈는데 최 선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 "올림픽 메달 100개보다 선수 목숨이 중요하다"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선 스포츠 인권 전문가들이 모여 긴급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사회자는 1년 반 전 같은 자리에서 토론회를 열었다고 했습니다.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의 성폭력 사건 후, 체육계의 문제점을 짚어본 자리였습니다. 당시 기사에 숱하게 지적된 성적 제일주의,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사제관계, 선수의 장래를 인질로 진실을 덮으려는 폐쇄적인 관행…. 슬픈 데자뷰였습니다. 메달과 성적이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원인을 몰라서도 아닌데, 우린 왜 제자리걸음일까요.

# "이제 시작일 뿐"

딸을 떠나보냈지만 아버지는 새벽부터 시작되는 농사일을 놓을 수 없습니다. 종일 걸려오는 기자들의 전화를 받고, 힘든 기억을 꺼내야 하는 인터뷰도 수 십 차례 응했습니다. 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귀찮은 내색 한 번 않으셨습니다. 저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감독과 선배들이 모든 폭행과 폭언을 부인했던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당황한 저는, 아버지가 가장 충격을 받으셨을 것 같아 걱정이 됐습니다. "그럴 줄 몰랐냐,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담담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아직 재판도 열리지 않았다고, 끝까지 가봐야 하지 않겠다고도 하셨습니다. 네,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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