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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쐈던' 무하마드 알리

입력 2016-06-04 15:14

인종 차별 극복하고 권투로 세계 최고 등극
불편한 몸 이끌고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로 감동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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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차별 극복하고 권투로 세계 최고 등극
불편한 몸 이끌고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로 감동 선사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쐈던' 무하마드 알리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쐈던' 무하마드 알리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쐈던' 무하마드 알리


4일(한국시간)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난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을 넘어 세계 복싱계의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알리는 1942년 1월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이름은 캐시어스 마셀루스 클레이 주니어였다. 1964년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알리로 개명하기 전까지 그는 클레이로 통했다.

당시 심각했던 인종차별을 겪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알리는 12세 때 자신의 자전거를 훔쳐간 이를 찾아 혼내주겠다는 생각에 우연히 권투와 연을 맺었다.

빨간색 글러브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알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때부터 알리는 자신의 모든 삶을 권투에 쏟아 부었다.

18세 때 이미 아마추어로서 100승을 넘게 올린 알리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목에 걸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복서의 최종 목표인 올림픽 금메달까지 따낸 알리는 그해 10월 프로로 전향했다. 데뷔 15연승을 달린 뒤 16번째 경기로 치른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아치 무어와의 대결에서는 4라운드 만에 TKO를 거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경기 전 상대의 KO라운드를 예고하는 쇼맨십과 철저한 자기 관리는 미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1964년 소니 리스턴과의 타이틀전을 앞두고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67년 3월 조라 폴리전까지 29연승으로 승승장구하던 알리에게 때 아닌 위기가 찾아왔다. 종교적 신념과 미국 내 인종차별을 이유로 징집 요구를 거부한 뒤 모든 것을 잃었다. 징역형을 받아 선수자격 박탈은 물론 챔피언 벨트까지도 빼앗겼다.

이후 '알리를 구제해야 한다'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어렵게 링으로 돌아온 알리는 1971년 3월 조 프레이저와의 15라운드 경기에서 판정패를 당했다. 데뷔 32경기 만에 처음 맛보는 패배의 쓴맛이었다.

물론 여기서 알리의 복싱 인생이 끝났다면 세기의 선수라는 칭호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알리는 1974년 조지 포먼을 누르고 WBC, WBA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은데 이어 33세이던 이듬해에는 프레이저에게 14라운드 TKO승으로 설욕에 성공했다.

알리는 1981년 12월 트레버 버빅전 판정패를 끝으로 프로 통산 56승5패의 성적을 남긴 채 정들었던 링과 작별을 고했다.

선수 시절 링 위에서 수많은 혈투를 벌였던 알리에게 은퇴 후 파킨슨병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하지만 알리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성화에 불을 붙이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회식은 올림픽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알리는 지난 수년 간 여러 차례나 호흡이 멈출 위기에 놓였지만 그때마다 보란 듯이 버텨내며 전 세계 팬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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