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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한국의 의병이란 파리 떼와 같다'

입력 2018-08-15 21:44 수정 2018-08-16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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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919년 4월 30일.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소요일람지도'

3·1 운동이 발생한 지역과, 일제가 그들을 향해서 발포한 지역이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 붉은 점은 서울과 평양은 물론 제주도까지 전국에 무려 170여 장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강제병합 된 지 9년.

걷잡을 수 없이 퍼졌던 3·1운동에 점령국 일본은 당황했고, 놀랐고, 그랬기에 더욱 잔혹하게 탄압을 가했습니다.

지난주에 고인이 된 황현산 교수의 칼럼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을사늑약 뒤에 당황했던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들이었다는 이야기.

'왕이 국권을 넘겨주겠다고 도장을 찍었는데 왜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그가 칼럼에서 인용한 책에 따르면, 당시의 한 일본인은 "한국 의병이란 파리 떼와 같다. 아무리 잡아도 계속해서 붙는 파리 떼가 있는 곳에 살 수는 없다"…

탄압해도 끊이지 않는 의병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다는데…

황현산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양력과세를 하라고 왕이 명령하면
온 나라가 일시에 설을 바꾸고,
왕이 항복을 하면 전 국민이 하나같이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일본이지만.
한국은 일본 같은 세로 사회가 아니어서'

부당한 무엇에는 결코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바로 그 의지에서 나온 것이 99년 전.

대한문 앞은 물론 전국을 가득 메웠던 3·1운동이었고 뒤이어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으니까요.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그 소요일람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국을 피로 물들였으나 끝내 꺾지 못했던…

조선국민의 마음이었습니다.

같은 공식에서 생각한다면 이해는 쉽습니다.

정부가 최종적, 불가역적이라고 했던 그 협약을 시민들은 왜 받아들일 수가 없는가…

그리고 바로 그 불가역에 동의했던 대통령까지 나서서 훼방을 놓았다고 보도된 강제징용 피해를 왜 끊임없이 제기하는가…

99년 전 비록 초라했지만 당당하게 선포한 상해의 임시정부가 왜 대한민국의 시작인가…

시민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한국인을 일컬어 파리 떼와 같이 아무리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다 비하했지만.

고 황현산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지극히 가녀린 촛불로 바닥을 단단하게 다진" 우리만의 민주주의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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