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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미안해" 넘어 '태아산재' 법 개정 기다리는 부모들

입력 2020-07-16 22:39 수정 2020-07-16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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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금 보시는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심장병을 앓았습니다. 아이 엄마는 제주의료원의 간호사였습니다. 지난 4월 대법원은 '일터의 환경 때문에 아이가 병이 났다'며 산재 보상을 하라며 사건을 고법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태아의 산재를 인정한 겁니다. 그리고 내일(17일) 고법의 선고가 있습니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싸워서 태아의 산재를 인정받은 간호사들, 하지만 기뻐하긴 이르다고 합니다.

여성국 기자입니다.

[기자]

[A씨/전 제주의료원 간호사 : 임신했을 때 내가 뭘 잘못했나 이렇게만 생각했지…]

제주의료원에서 일했던 A씨는 2010년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았습니다.

[A씨/전 제주의료원 간호사 : 어린이집에서도 대놓고는 아니지만 거절했었어요. 심장이 아픈 아이라고 하니까 받길 꺼리는 것도 있어서 여러 가지로 힘들었었죠.]

환자에게 먹인 가루약에 해로운 성분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2014년 소송을 시작했고, 지난 4월 대법원은 "어머니와 아이는 한 몸"이라며 산재를 인정했습니다

산재는 노동자에게만 적용되고, 아이는 대상이 아니란 원심 판결을 뒤집은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은 그대로입니다.

[A씨/전 제주의료원 간호사 : 축하한다고 전화가 오거든요. 근데 저희 일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어디서 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는 똑같이 아이를 병원 데리고 다니면서.]

판결만 났을 뿐, 산재보상보험법과 관련 시행령 등은 아직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판결이 나오고 법이 개정되어야 실무적인 보상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 아픈 아이 낳은 반도체 노동자들…"엄마가 미안해"

[앵커]

제주의료원의 간호사 말고도 태아 산재를 의심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더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임신 중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유해 물질에 노출됐다"고 주장합니다.

여성국 기자가 이어서 보도합니다.

[기자]

[김은숙/전 삼성전자 온양공장 노동자 : 4시간 만의 진통 끝에 태어난 아이.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김은숙 씨는 1991년부터 7년 넘게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김은숙/전 삼성전자 온양공장 노동자 : 우리 아들은 대장 전체를 들어낸 '선천성 거대결장'이란 수술을 했어요.]

반도체 칩을 보호하기 위해 코팅하는 일을 했는데 임신 3개월째 일을 그만뒀습니다.

[김은숙/전 삼성전자 온양공장 노동자 : 너 태어나고 나서 한 달 후에는 사진들이 없어. 한 달 동안은 병원에 있었거든. 그러고 나서 한 달 후에 퇴원을 했는데 그때부터 사진들을 차곡차곡 쌓아놨는데.]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칩을 감싸는 재료에 열을 가하는 과정에서 벤젠 같은 유해 물질이 나올 수 있습니다.

[김은숙/전 삼성전자 온양공장 노동자 : 미안하다 아들아. 이게 배예요. 아니면 물고기가 지나가는 거예요. 마음의 상처가 너무 큽니다.]

김희정 씨는 1995년부터 약 12년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김희정/전 삼성전자 기흥공장 노동자 : 애가 콩팥이 안 좋아서 약을 세 가지 먹고 있는데 두 가지는 혈압약이고요.]

판에 자외선을 쬐어 회로패턴을 그리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김희정/전 삼성전자 기흥공장 노동자 : 거의 만삭 때까지 일을 했어요.]

유해 물질도 다뤘다고 합니다.

[김희정/전 삼성전자 기흥공장 노동자 : 독한 냄새였어요. 할 때마다 작업자들이 냄새 너무 심하다고 할 정도로.]

배 속 아이에게 문제가 있단 말을 들었던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김희정/전 삼성전자 기흥공장 노동자 : 초음파를 하는데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라고요. 콩팥이 하나가 없고 소변 역류가 보인다. 큰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이들은 '일하는 환경이 아이 건강에 영향을 줬다'고 의심하지만, 지금의 법으로는 산재 신청이 어렵습니다.

산재 보상 대상이 노동자로만 한정돼, 태아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희정/전 삼성전자 기흥공장 노동자 : '엄마 나 왜 아프게 낳았어' 그럴 때 할 말이 없죠. 그냥 '미안해' 말밖에.]

■ 폐기됐던 '태아산재 법안' 재발의…국회, 이번엔?

[앵커]

법원, 그리고 일부 기업들은 태아 산재를 인정하고 있는 흐름입니다. 하지만 보다 안정적인 보호, 그리고 보상을 위해선 명확하게 법이 마련돼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20대 국회를 돌아보니, 태아산재 관련 법안은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되고 폐기됐습니다.

이 내용은 임지수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김기남/삼성전자 대표이사 (2018년 11월) : 삼성전자는 과거 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 건강 유해 인자에 의한 위험에 대해 충분하고 완벽하게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삼성은 2018년 지원보상위원회를 통해 선천성 기형 등 자녀 질환 26건을 보상했습니다.

위원회는 "질병과 인과관계보다는 피해자 구제에 초점을 뒀다"고 설명했습니다.

[김명희/예방의학전문의 (시민건강연구소) : 엄마이든 아빠이든 (유해물질) 노출에 의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이미 수많은 보고 사례들이 있고 논문이 있기 때문에]

1980년대 초부터 20년간 미국 IBM 반도체 공장 노동자 자녀 50여 명도 암과 선천성 기형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우려한 IBM은 노동자들과 보상에 합의하며 사실상 위험성을 인정했습니다.

고용노동부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생식 독성 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는 인구 1000명당 아픈 아이를 더 많이 낳았습니다.

[이현주/우송대 간호학과 교수 : 법적 테두리 안에서 태아가 성인이 되기까지 필요한 경제적 보상을 어떻게 디자인할지도 중요하다는…]

지난 20대 국회에서 태아 산재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별 논의없이 폐기됐습니다.

 최근 국회에선 산재대상에 자녀를 포함시키는 내용의 산재보상보호법 개정안들이 다시 발의됐습니다.

[김희정/전 삼성전자 기흥공장 노동자 : 다른 곳에 힘 쏟지 말고 이런 일에 더 적극 나서줬으면 좋겠어요.]

김희정 씨와 김은숙 씨는 법이 개정되면, 자녀 질병에 대해 산재를 신청할 예정입니다.

독일은 1977년 태아 산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하고, 관련 법안을 만들었습니다.

(영상취재 : 김정용 / 영상디자인 : 강아람 / 영상그래픽 :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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