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계절을 재촉하는 가을장마와 태풍이 번갈아 한반도를 찾아옵니다.
비는 그칠 듯 그치지 않으면서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지요.
1973년 발표된 윤흥길의 소설 속 그 여름에도 긴 장마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 윤흥길 < 장마 >
작품의 배경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나라가 이념으로 두 동강이 나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돌렸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친할머니와 살고 있던 소년의 집에 피란을 내려온 외할머니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는데…
"
오삼촌이 존냐,
친삼춘이 존냐"
(외삼촌이 좋으냐 친삼촌이 좋으냐)
- 윤흥길 < 장마 >
한 사람의 아들은 육군소위로 전사했고, 다른 사람의 아들은 빨치산으로 숨어든 상황.
할머니의 이런 거듭된 질문은 답할 수 없는 비극을 상징했습니다.
마치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맞부딪히며 내리는 장마처럼…
가족 간에 형성된 지루한 장마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2019년 여름의 끝자락.
마치 세상은 반 토막이라도 난 듯…
논란과 의혹은 긴 장마전선을 형성하면서 한 달 가까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공정하지 않은 출발선을 비난했고, 누군가는 그저 과장된 의혹일 따름이라고 주장합니다.
한편에서는 사법개혁의 절박함을 이야기했고, 다른 편에서는 그것이 왜 꼭 그여야만 하는가에 물음표를 달았지요.
그래서 2019년의 늦여름은 계급과 정의와 정치의 셈법을 두고 벌이는 한바탕의 전쟁터가 돼서 지루한 장마는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 데나 손가락으로 그저 꾹 찌르기만 하면 대꾸라도 하는 양 선명한 물기가 배어 나왔다.
세상이 온통 물바다요 수렁 속이었다."
- 윤흥길 < 장마 >
"세상이 온통 물바다요 수렁 속"이니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상처받아야 했던 사람들.
아니, 슬며시 감춰졌던 그 모든 것들을 선명하게 대면한 이상 장마는 혹시 지금부터 본격 시작된 것일까…
윤흥길의 소설 속, 전쟁의 그 여름.
"인자는 다 지나간 일이닝게…어서어서 맘이나 잘 추시리기라우"
손을 맞잡은 채 두 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윤흥길 < 장마 >
서로를 증오하고 밀고하며 비극적 운명에 휘둘렸던 그들은…
그러나 결국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시작된 뒤늦은 장마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있으니…
공교롭게도 그의 청문회가 열리는 날은 태풍이 오는 날.
긴 장마가 태풍과 함께 지나가면 우리 역시 소설의 마무리처럼 오늘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윤흥길 < 장마 >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