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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공' 추켜세우며…아이까지 노예노동 내몬 총독부

입력 2020-08-13 21:29 수정 2020-08-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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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은 성인 남성들과 위안부 피해자들뿐 아니라 아이들과 다른 여성들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이들에 대한 강제 동원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를 반박할 만한 귀중한 자료들이 광복 75주년을 앞두고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강나현 기자입니다.

[기자]

[대한뉴스 (1982년) : 일본은 우리 한국민을 500만명이나 끌고 가 노예처럼 혹사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때, 조선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는 그저 노예 일지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책 보고 친구들과 노는 대신, 척박한 땅을 쉼 없이 갈아 논밭을 만들고 모내기부터 가을걷이까지 하며 한 해를 보낸 어느 초등 6학년 아이는 병 든 보리를 많이 뽑아내고 군말 없이 풀도 잘 벤다며 '낫질의 달인'이라는 원치 않던 별명을 얻었습니다.

중학생의 학적부엔 혹한기 훈련 실적이 적혀 있습니다.

[이영도/국가기록원 연구관 : 이 학생이 졸업하고 중국 전쟁터에서 현역병으로 활동을 합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전쟁에 내보낼) 계획이 있지 않았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연일 아이들을 소년공이라고 추켜세우며 온갖 일터로 내몰았습니다.

후방에 남겨진 여성의 삶에도 자유는 없었습니다.

한 달에 10만 부를 찍어낼 정도로 인기 있던 총독부 여성잡지에선 남편이 전쟁터에서 살아오는 대신 일왕을 위해 공을 쌓길 기도하라고 했고, 일본 군인을 위해 '백의의 천사'가 되라며 또 다른 전쟁터로 내몰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위해 초등생도, 여성도 가리지 않고 조선 사회를 전시 체제로 개편하려 했던 겁니다.

(화면제공 : 국립중앙도서관·국가기록원·동북아역사재단)
(영상디자인 : 배윤주 / 영상그래픽 : 박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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