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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카메라] '우리의 오늘' 있게 한 '광복군'…항일 투쟁 흔적들

입력 2019-08-14 21:23 수정 2019-08-1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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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40년,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 충칭시에서 한국 광복군의 창설을 선언하던 모습입니다. 그 뒤로, 광복까지 5년이 더 걸렸습니다. 지금도 중국 현지에는 광복군의, 항일 투쟁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밀착카메라가 오늘(14일)과 내일, 이틀에 걸쳐 전해드립니다.

윤재영 기자입니다.

[기자]

무너진 돌벽에 무궁화 다섯 송이가 꽂혀 있습니다.

돌담을 따라와보니 나무를 겹치고 흙을 덮어 만든 오래된 건물인데요.

안 쪽은 부서진 침대나 장롱 같은 것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곳은 중국이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포로를 수용하던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그 일본군 포로들 중에는 조선인도 섞여 있었습니다.

1940년 9월 중국 충칭시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기념식을 연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각지에서 조선 청년을 광복군 대원으로 모집했습니다.

이 수용소에서도 일제에 강제 징집된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복을 벗고 광복군이 됐습니다.

당시 중국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는 1945년 5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포로 32명을 인도해갔다고 기록합니다.

지금은 주민 20여 가구가 모여살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 : 전부 바뀌었어요. 일부분만 남았죠.]

비석 하나 있는 것 말고는 수용소 흔적을 찾기도 어렵지만, 주민들의 입에서 임시정부 요인의 이름을 듣습니다.

[마을 주민 : 90살 돼 보이는 한국인이 왔었어요. 여기에서 (과거에) 포로를 위해 밥을 했었대요. 10여 년 전 일이에요. 윤경빈(백범 김구 선생의 경위대장).]

이렇게 중국 각지에서 모인 광복군 대원은 1945년에는 700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들의 활동 흔적을 찾아 중국 시안시로 갔습니다.

광복군 제2지대 본부가 있던 시안시 장안구의 두곡진 마을.

당시의 건물은 헐려 사라졌지만, 광복군 주둔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2014년 중국 정부와 협의해 본부 터 옆에 세운 것입니다. 

이범석 장군이 이끈 광복군 제2지대가 준비한 것은 국내침투작전인 이른바 '독수리 작전'.

미국 CIA의 전신인 OSS부대와 특수 훈련을 거친 뒤 국내로 들어가 일본군과 싸운다는 시나리오입니다.

당시 OSS 내부 기밀 문서에는 훈련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평가기지는 독수리기지(제2지대 본부)에서 16마일 떨어진 산속의 버려진 절에 설치되었다.'

'단체 검사는 더 깊숙한 산속에서…'

'협곡을 올라가면…절벽을 오르고 내리는 안전한 방법이 요구됐다.'

기록을 따라 제2지대 본부 터에서 차로 약 30분 달린 곳.

산 자락에서 '미타고사'라는 오래된 절을 만났습니다.

바로 OSS 기록에 나오는 '버려진 절'입니다.

무장 훈련을 받은 '더 깊숙한 산 속'은 어디일까.

산길을 따라 올라오다보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둘러싸인 평평한 평지가 나왔습니다.

당시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했을 때 이 곳에서 한국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국내 침투를 위한 비밀훈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훈련을 시찰한 김구 선생의 기록 역시 백범일지에 남아 있습니다.

[한시준/단국대 사학과 교수 (OSS 훈련 장소 발굴) : 나라 뺏긴 백성이 30년도 지난 그 시기에 젊은 청년들이 국내에 쳐들어가겠다고 산골짜기에 가서 훈련. 그렇게 피땀 흘렸던 데다…]

올해 초에는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도 복원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식 개관은 이뤄지지 않아 제대로 된 활용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임시정부 항일투쟁 정신의 총체인 한국광복군.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이들의 숨결은 지금도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영상디자인 : 박성현 / 영상그래픽 : 김지혜 / 인턴기자 : 윤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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