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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라이브]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입력 2019-06-11 17:48 수정 2019-06-12 14:30

친일 경찰, 위협된 반민특위 직접 습격
이후 엇갈린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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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경찰, 위협된 반민특위 직접 습격
이후 엇갈린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

'6월 6일'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장병과 순국선열의 충성을 기리기 위한 '현충일'을 생각하는 분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하지만 70년 전인 1949년 6월 6일에는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반민특위 습격사건'입니다.

'반민특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줄인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친일파가 벌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국회에 설치됐던 특별기구입니다. 이 반민특위를 1949년 6월 6일 경찰이 습격했고 이 일을 계기로 반민특위 폐기 법안이 통과됩니다. 1949년 1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5개월 만입니다. 그렇다면 경찰은 왜 반민특위를 습격했을까요? 해방 직후 경찰 중 80%가 일제 강점기 때의 경찰로 구성됐기 때문입니다. 반민특위 활동이 이들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따라서 경찰이 1949년 6월 6일 처음 했던 일은 당시 반민특위 청사에 보관 중이던 친일 행위 고발장과 그 증거들을 태우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남 지역 조사관이었던 고 백재호 선생님에 따르면 목포에서만 고발장 6천통이 들어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추론해볼 때 경찰의 습격으로 사라진 고발장은 최소 수만 장에 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증이 사라진 탓에 반민특위가 잡아들인 친일파 중 사형을 당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체형을 받은 14명조차 곧바로 풀려났습니다.

이때 풀려난 사람 중 하나가 친일 경찰 하판락입니다. 주사기로 혈관을 찔러 그 안의 피를 뽑는 고문으로 유명했습니다. 같은 민족에게 이렇게 잔인한 행위를 하고도 풀려난 하판락은 일제 때 모은 돈으로 신용금고를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반면, 하판락에게 고문을 당했던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삶은 기구합니다. 평생 독립운동가라고 말도 못 한 채 고문으로 얻은 장애를 안고 살았습니다. 강희연 기자가 직접 만난 이광우 선생의 아들 이상국 씨에게도 존경은커녕 비아냥을 받던 아버지의 모습은 가슴 아프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친일파의 종북 프레임이 컸습니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 세력이 반대로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척결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유선의 기자가 당시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았던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육 씨를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 선생의 가족들도 피난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군이 서울을 지키고 있다"는 방송에 속아 서울에 남았고, 김상덕 선생은 결국 북한군에 잡혀 납북됐습니다. 그때부터 '빨갱이' 꼬리표가 따라다닌 탓에 김정육 씨는 일용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흔이 된 지금도 서울의 한 임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습니다.

바로잡히지 못한 과거 때문에 기구한 삶을 산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 그들이 가슴 아파하는 것은 자신들의 가난이나 초라한 일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7일 '소셜라이브 프라이데이' 때 많은 분들께서 다시 보고 싶다고 요청해주신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 아들 이상국 씨의 인터뷰 내용을 올립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또 다른 6월 6일의 의미를 가슴 속 깊이 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가슴 아파했던 것 중 하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때 '항일운동했습니다' '독립운동했습니다' 하면 주변 사람들이 박수치고 존경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형무소에서 나와 부산에 기차를 타고 와서 거지꼴로 신발도 없이 맨발로 집에 기어와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1~2년 병간호를 하다 보니 그것을 보는 이웃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잘 봐라, 멋모르고 까불다가 이 모양이 된다. 시대에 순응해라.' 시대에 따라가라는 것에 대한 표본으로 보여준 것이죠. 요즘도 무슨 일 있으면 '앞장서지 마라' '나대지 마라' 하잖아요. 우리 머릿속에 일본이, 친일 경찰이 심어준 것은 '그냥 조용히 따라와라' '가만히 있어라' 그것입니다."

※ 소셜라이브 하이라이트 <6분순삭> 영상에서는 1947년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의 개요와 함께 그 이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은 고통을 담았습니다.

(제작 :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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