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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① "그곳은 지옥"…강제징용 현장, 아소탄광을 가다

입력 2019-03-06 21:41 수정 2019-03-20 02:04

특별기획│강제징용 현장, '아소탄광을 가다'
'강제동원 부인' 망언 부총리는 '창업주 손자'
납골당엔 조선인 이름…지울 수 없는 징용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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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강제징용 현장, '아소탄광을 가다'
'강제동원 부인' 망언 부총리는 '창업주 손자'
납골당엔 조선인 이름…지울 수 없는 징용의 흔적

[앵커]

오늘(6일) 저희들은 며칠동안 특별하게 취재한 내용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앗세이', 압제를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아소탄광은 앗세이탄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악명이 높았죠. 강제징용의 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생존자들은 그곳을 "지옥"이라고 회상합니다. 아소탄광 창업주의 손자는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망언의 장본인인 현 아베 정권의 2인자 아소 다로 부총리입니다. 아베 총리는 "최근 한·일문제에 있어서는 일본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거침없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도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아소탄광 강제동원의 현장을 윤설영 특파원이 다녀왔습니다.

[기자]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서 동쪽으로 약 1시간.

일본의 3대 석탄생산지인 지쿠호 지역입니다.

평범한 주택가에 1970년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탄광의 입구가 남아있습니다. 

지쿠호 지방에 남아있는 유일한 탄광입구입니다.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은데요.

바닥의 경사가 45도쯤 될 정도로 매우 가팔라서 제대로 발을 딛고 내려가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강제징용자들은 허리도 제대로 펴기 어려운 석탄 굴 속에서 중노동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소 탄광은 '압제 탄광'이라 불릴만큼 노동환경이 혹독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 약 8000명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4900명이 감시의 눈을 피해 도망갔을 정도입니다.

[도노무라 마사루/도쿄대 교수 : 기본적으로 야쿠자가 지배했습니다. 사람들이 도망가거나 잡혀 돌아오면 '린치'를 당하고…]

아소 탄광 인근 호코지라는 작은 절에 세워진 묘비입니다.

'조선인 탄광 순난자'라고 또렷이 적혀있습니다.

아소 가문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거대한 공장은 100년 넘게 가동 중인 아소시멘트 공장입니다.

공장이 보이는 이곳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이 살았습니다.

[박강수/재일 사학자 : (조선인 기숙사를) 료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수감소예요. 자유가 없고, 일만 하는 수감소였어요.]

아소시멘트 공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타테 공동묘지입니다.

이곳에 조선인 위령비가 설치되어 있는데요.

위령비 어디에도 조선인이라는 표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소시멘트 측이 위령비에 '조선인'이라는 문구를 넣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납골당 문을 열어봤습니다.

하얀 광목에 조선인 이름이 쓰여진 유골함이 안치되어있습니다.

[박강수/재일 사학자 : 김도화, 여자 이름이죠. 아소시멘트에서는 여자도 일을 많이 했습니다.]

조선인 14명과 무명인 등 총 32기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박강수/재일 사학자 : '18구가 일본 사림이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일본식으로 바꿨기 때문에 (조선인일 수도 있습니다.)]

[도노무라 마사루/도쿄대 교수 : 안전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어서 사고가 잦았습니다. 일본인 노동자가 줄면서 자연히 조선인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죠.]

아소시멘트 사장을 지낸 아소 부총리는 조선인의 강제징용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영상디자인 : 오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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