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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③ 70여 년 흘렀지만 선명한 기억…징용 피해 밝힐 증거는

입력 2019-03-06 21:49 수정 2019-03-20 02:05

특별기획│강제징용 현장, '아소탄광을 가다'
증거 감추기 급급한 아소 기업
"건강보험대장으로 강제동원 규모 등 파악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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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강제징용 현장, '아소탄광을 가다'
증거 감추기 급급한 아소 기업
"건강보험대장으로 강제동원 규모 등 파악 가능"

[공재수/아소광업 강제징용 피해자 : 나라 없는 설움이…내가 뭐 때문에 일본 사람들한테 붙들려서 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학대를 하나?]

[앵커]

아소 다로 집안의 호사스러움은 어찌보면 이런 강제징용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1943년에 아소 탄광으로 끌려갔던, 97살 공재수 할아버지는 아직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보입니다. 아소 기업 측이 관련 자료 유출을 철저히 막고 있어서 피해자 구제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어환희 기자입니다.

[기자]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3년의 거리는 76년이 지난 지금도, 공재수 할아버지 머릿 속에 선명합니다.

[공재수/아소광업 강제징용 피해자 : 길에 젊은 사람들이 다닐 수가 없었어요. 보이면 보는 대로 차에 실어서 어디론가 가버리고요.]

22살에 아소 광업의 아카사카 탄광에 끌려왔습니다.

[공재수/아소광업 강제징용 피해자 : 단장(짧은 지팡이)으로 두드려 패고 찌르고. 잔다고 일하라고.]

도망치다 붙잡혀 오기를 반복했습니다.

[공재수/아소광업 강제징용 피해자 : 얼마나 두드려 맞았는지 화장실에 가서 일을 못 봤어요. (왜 때리는 거예요?) 왜 도망을 갔느냐, 누가 가자고 해서 갔느냐.]

해방 후 1년이 지나서야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공재수/아소광업 강제징용 피해자 : 배에서 내리자마자 얼마나 반가운지…부산아 너 잘 있었냐 내가 얼굴을 대고 막 울었어요.]

공 할아버지처럼 일본에 있는 아소 광업 10개 노역장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1만 1000여명으로 추산됩니다.

당시 한반도에 있었던 26개 작업장까지 감안하면 피해자 수는 훨씬 늘어납니다.

아소 광업은 안면도에 임업소를 만들어, 경복궁 보수에 쓰이던 최고급 소나무도 반출했습니다.

일본 내 탄광 입구 등을 고정하는 용도였습니다.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연구위원 : (피해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아소는 자료들을 몽땅 규슈대학에 기증해서 자료가 나가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2년 전 재일동포 고 김광열 씨가 남긴 자료들이 진상규명의 유일한 증거인 이유입니다.

무연고자들의 묘비 위치 지도, 사망 기록이 적힌 증서들이 있습니다.

아소 광업의 건강보험대장을 통해서는 당시 회사가 동원한 조선인 규모와 동원 기간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국가기록원은 JTBC에 분석을 마친 강제징용 기록물들은 오는 12월부터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연구위원 : 정리가 빨리 돼서 최소한 피해자 사회에서는 이런 것들을 알고 본인들의 권리에 대해서 생각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대일항쟁기 피해조사위원회가 파악한 아소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는 500여명입니다.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공재수/아소광업 강제징용 피해자 : 97살인데, 내일이 어떨지, 모레가 어떨지 내가 알 수가 없거든요. 한 가지 소원은 아소 다로가 한마디라도 사죄를 했으면 좋겠어요.]

(영상디자인 : 강아람·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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