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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되돌아본 자취들

입력 2019-01-01 22:18 수정 2019-03-20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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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임시정부 수립이 이 나라의 시작이냐 아니냐를 놓고 어찌보면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돼왔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늘 등장했던 이 외침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새겨져있습니다. 현행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1948년을 건국일로 삼자는 일각의 주장과 배치되는 역사적인 사료지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가 시작된 그 곳,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자취를 품고 있는 중국 상하이에서, 김혜미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1919년 4월 11일. 이곳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이날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공포됐습니다.

3·1 독립운동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국내외 인사들이 모여 뜻을 합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은 점차 위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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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천여 명이었던
상하이 동립운동자의 수는
점차 줄어 겨우 수십 명에
불과했다.

임시정부엔 외국인은 고사하고
한인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김구 <백범일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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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했지만,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이어지며 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었습니다.

탄압은 훨씬 거세졌습니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백범 김구 선생은 한 중국 인사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겼습니다.

[추정위안/추푸청(백범 김구 조력자)의 손자 :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요인인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딱 네 명밖에 없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피난처에서도 눈을 피해 호수 위 선상에서 생활하며 회의를 하기도 했었고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인 1932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이곳 항저우로 옮겨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전장-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계속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1945년 광복까지, 27년간 임시정부는 가혹했던 우리 민족의 시간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일제가 영토를 빼앗고 민족을 탄압했어도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공화제는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 임시정부 요인들이 외롭게 걸었던 그 길의 오늘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장예나 : 암울한 현실 속에 희망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졸업을 하는데 앞길이 막막하거든요.]

[신은희 : 옳은 일, 의로운 일에 대해서 우리 국민이 전부 다 하나됐으면 좋겠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역사를 마주한 사람들은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이어갑니다.

(자료제공 : 독립기념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영상디자인 : 신재훈·이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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