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를 하나 풀어보자. 아래와 같이 횡단보도에서 서로 다른 2개의 신호등을 마주친다면, 건너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정답은 건너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 도로는 차들이 계속 달리는 중이다. 오른쪽 신호를 보고 횡단보도에 발을 디뎠다가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왜 신호등이 2개라는 거야?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횡단보도는 실제로 존재한다.
이어서 두 번째 퀴즈. 이번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다. 건너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정답은 이번에도 건너지 않는 것. 지금 신호는 빨간불이기 때문이다. 신호등도 없는데 무슨 빨간불? 뒤를 돌아보면 신호등이 있다. 신호등이 정면에는 없고 후면에만 있는 거다. 그리고 이 역시 실제로 존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해할 수 없는 이 횡단보도들이 모두 하나의 교차로에 있다는 것이다. 건너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이곳. 작은 탐사, 소탐해봤다.
■ 횡단보도① 확률은 반반, 감을 믿어야 할까교차로 상황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가상의 이야기로 설명해보겠다.
상암동 주민 TOM은 길 건너 아파트로 가려고 횡단보도에 섰다. 그런데 눈 앞에 보이는 신호등은 2개. 왼쪽 신호등은 빨간불, 오른쪽 신호등은 초록불이 들어와 있다. 무엇을 보고 건너야 할까? 신중한 성격의 TOM은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했다. 찾아보니 보행자 신호등은 횡단보도 건너편 오른쪽에 설치하는 것이 규정이란다.
마침 오른쪽 신호가 초록불이니 건너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여전히 쌩 지나가버리는 차들. 차량 신호등도 여전히 초록불이다. 당황한 TOM이 뒤쪽 신호등을 확인해보니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빨간불이 맞는 신호였다.
■ 횡단보도② 신호인듯 신호아닌 신호같은 그 옆에 또 다른 횡단보도에는 SIL이 대기 중이다. 이곳은 신호등은 따로 없는 듯하다. SIL은 차가 없을 때 횡단보도에 들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에서 차 한대가 불쑥 우회전을 하고 들어와 경적을 울렸다. 놀란 마음에 다급히 길을 건넌 SIL. 아까 자신이 서 있던 곳을 돌아보니, 거기에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이 있었다.
■ 현장관찰① 초록불이 보이면 일단 건너게 된다실제로 이 교차로에 들어서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현장에서 관찰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에는 JTBC 디지털뉴스룸 인턴 4명이 피실험자로 참가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미리 교차로를 볼 수 없도록 참가자 4명에게 안대를 씌운 뒤, 문제의 횡단보도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안대를 벗으면 신호등을 보고 건널지 말지 판단하라고 했다. (안전을 위해 실제 신호(좌측 신호)가 초록불 일 때 안대를 벗으라고 지시했다.)
2개의 신호등이 있는 첫 번째 횡단보도. 안대를 벗자마자 길을 건너는 참가자도 있었고, 잠시 머뭇거리다 건너는 경우도 있었다.
[참가자 임예지]
초록불이 뜨니까 그냥 본능적으로 갔어요.
[참가자 이가람]
오른쪽 신호등이 초록불이었어도 건널 것 같아요.
둘 중 하나라도 초록불이 있으면 일단 보행했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실제 신호가 빨간불이었다면 위험했을 거다.
■ 현장관찰② 신호등이 없으면 의심 없이 건넌다다시 안대를 쓰고 두 번째 횡단보도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안대를 벗고 횡단보도 상황을 본 뒤 길을 건널지 말지 결정하라고 했다.
일단 신호등이 보이지 않자 다들 바로 건너지는 않았다. 그러다 차가 오지 않음을 확인한 1명이 먼저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 위에 정차한 차량 때문에 다들 머뭇거리고 있던 사이, 참가자 하나가 자기 뒤에 있던 신호등을 발견했다. 다들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참가자 주혜령]
신호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자연스럽게 건넜어요.
[참가자 김하늘]
여기가 어린이 보호구역이더라고요. 초등학생들이 많이 다니는데 이렇게 위험하면 아이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보행자들도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인 줄 알고 그냥 건너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우회전 차량이었다. 차가 우회전을 할 때는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불이면 일시정지를 한다. 하지만 이 횡단보도는 우회전 차량이 신호등을 볼 수 없다. 보행자를 보지 못하면 그냥 지나쳐버릴 위험이 높아 보였다.
■ 총체적 난국의 원인은 '각도'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교차로. 그 시작은 바로 신호등 한 대에서 시작됐다. 사진의 신호등 1번과 2번은 원래 마주 보는 한 쌍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2번 신호등의 각도가 시계방향 90도로 틀어지며 이 사달이 난 거다.
게다가 여기는 어린이 보호구역. 교차로를 기준으로 200m 안에 어린이집, 초등학교, 중학교가 모여 있다. 인근에 공사 현장도 있어 대형 차량도 자주 다니는데, 신호가 헷갈리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 틀어진 신호등,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신호등이 제멋대로 틀어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하다. 서울시청 홈페이지에서 민원 내역을 찾아보니 과거에 비슷한 민원이 20건 정도 더 있었다.
이번 기사에서 다룬 '혼돈'의 신호등은 담당 기관에 빨리 바로잡아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금방 조치하기로 했다.
매일같이 굵직한 뉴스들이 쏟아지는 요즘, 신호등 하나가 엉뚱한 방향으로 서 있는 것쯤은 시시해 보이기도 한다. 현장에서 보니 눈치 빠른 사람들은 요령껏 길을 잘 건너기도 했고, 민원만 들어가면 수리도 곧바로 가능했다. 그러나 사소한 일이라고 전부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우리 일상은 이런 사소한 것들로 이뤄져 있다. 작은 실수가 누군가에겐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점 잊지 말자. 소탐대실이 존재하는 이유다.
※ 서울시는 2008년부터 교통신호등 고장신고 포상제를 시행하고 있다. 최초 신고자에게 건당 1만 원을 제공하며 개인별 월 한도는 20만 원이다. 신고는 다산콜센터(120)를 통해 가능하다. 여러분도 주변 신호등을 잘 살펴보고 일상을 지켜보자.
소탐대실 끝.
기획·제작 : 김진일, 김영주, 박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