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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꽃보다 가벼운 이슬로 사라진 이들에게"

입력 2017-04-05 22:46 수정 2018-04-1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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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작가는 봄의 이치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고 할퀴어져 폐허가 되어버린 곳이라 할지라도 꽃은 어김없이 핀다는 것….

그 해에도 벚꽃은 흐드러졌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74년 4월, 대통령 박정희는 특별한 조치 하나를 선포했습니다.

긴급조치 제4호.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활동에 찬동하거나 관련된 모든 표현물을 제작·배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되었고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는 '절대법'은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또다시 벚꽃이 흐드러졌을 4월의 대법원에서는 이 긴급조치 4호를 어겼다고 강요된 여덟 명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합니다.

판결이 나온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집행된 사형. 그들이 바라보았을 벚꽃은 그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른바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입니다.

"사형수들은 마지막 날까지 가족 면회를 하지 못했다. 유신정권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화장터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몸에 남은 고문 자국을 지우려고 저지른 또 다른 만행이었다"

그들에게 내란 혐의를 덧씌우고 목숨을 앗아간 제도는 바로 '법'

국제 법학자회는 그래서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법은, 법치주의는 그 숱한 오류와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과 목숨을 담보로 조금씩 정당해지고 단단해져 왔던 것.

이 땅의 법치주의는 그렇게 한 발 한 발 더딘 걸음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대한민국은 법치주의가 안 됐다"

이미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라 말했던 그녀는 법치주의의 전당에서 또다시 날 선 말을 쏟아냈습니다.

헌정사상 첫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태를 초래한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이 외치는 이 날 선 외마디는 우리의 법치주의가 앞으로도 끊임없이 정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작가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의 첫 한 줄을 쓰기 위해 여러 밤을 고민하며 또 고민했다 합니다.

43년 전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법 위에 군림했던 통치자의 2세가 긴 세월을 돌아 결국 법에 의해 탄핵되면서 비로소 박정희 시대가 마감됐다는 지금….

비가 그치고, 밤이 지나면 다시 벚꽃은 필 터인데 꽃보다 가벼운 이슬로 사라졌던 사람들에게 보내는 오늘(5일)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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