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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아처의 기이한 부진

입력 2016-08-2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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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을 앞두고, 메이저리그 사이영 상 후보를 뽑는다면 누구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내셔널리그를 대상으로 한다면, 십중팔구 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의 이름이 나왔을 것이다. 내셔널리그 최고의 투수는 커쇼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메리칸리그는 어땠을까. 내셔널리그와 달리 아메리칸리그의 지배자는 한 명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2015년 수상자인 댈러스 카이클(휴스턴 애스트로스)? 2014년 수상자 코리 클루버(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13년 수상자 맥스 슈어져(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아니면 영원한 후보, 크리스 세일(시카고 화이트삭스)?

쟁쟁한 이름들이 잇달아 떠오른다. 그리고 분명히, 그 중에선 이 선수의 이름도 있었을 것이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에이스, 크리스 아처.

전임 에이스였던 데이비드 프라이스(보스턴 레드삭스)가 떠난 2014년 전부터, 아처는 레이스의 미래로 점쳐졌다. 지난해는 그 기대감에 100% 부응한 시즌이었다. 212이닝동안 잡아낸 삼진 252개는 아메리칸리그 2위 기록이었다. 평균자책점(ERA)은 3.23으로 아메리칸리그 6위에 올랐고, 승리 기여도(WAR)는 5.3으로 5위에 올랐다. 미래의 에이스가 화려하게 대관식을 준비한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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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올해 시작은 긍정적 전망을 산산히 깨부수며 시작됐다. 4월에는 1승 4패 ERA 5.01, 5월에는 2승 2패 ERA 4.18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냈다. 결국 전반기는 4승 12패 ERA 4.66이라는 부진 속에 끝났다. 선수, 구단, 팬 모두에게 당혹스러운 하락세였다.

보통 투수의 성적이 이 정도로 크게 나빠질 때는 비슷한 원인들을 찾을 수 있다. 투구 동작이 흔들리면서 제구력이 나빠진다거나, 구속이 떨어지거나 한다. 이는 볼넷과 피안타, 피홈런의 증가, 탈삼진의 감소 등 수치로 나타난다.

전반기까지 아처의 9이닝당 볼넷 숫자는 3.9개였다. 지난해 2.8개에 비하면 크게 늘어났다. 피안타율 역시 지난해 0.219에서 전반기 0.256으로 치솟았다. 볼넷 허용률과 피안타율의 상승은 일반적으로 '제구력이 나빠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제구력이 나빠지면 탈삼진 숫자도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처의 경우는 달랐다. 아처는 전반기 110이닝 동안 삼진 130개를 잡아냈다. 9이닝당으로 환산하면 10.6개가 된다. 지난해 기록한 10.7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의 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는 신호다. 실제로 아처가 주로 던지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구속, 움직임은 지난해와 큰 차이가 없다.

가진 무기는 그대로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 경우다. 구위가 그대로인 채로 제구력이 좋아지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대개 유망주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아처의 경우, 구위는 그대로지만 제구력이 나빠졌다. 그런데 제구력이 나빠졌지만 탈삼진 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삼진은 타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정교한 제구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빠진 제구력에도 삼진은 많이 잡아내는, 아처와 같은 사례는 쉽게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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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부진에서 탈출해 맹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올스타전을 기점으로 한 후반기 ERA는 3.06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볼넷 허용률도 전반기 3.9개에서 1.5개로 크게 줄어들었다. 피안타율도 0.206으로 지난해 수준까지 떨어졌다. 탈삼진을 잡아내는 능력은 여전하다. '2015 크리스 아처'로 다시 돌아간 모습이다.

기이한 부진과 반등의 원인을 명확하게 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선수 본인조차 슬럼프와 맹활약의 원인을 정확히 모를 때도 있다. 아처의 사례에서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원인 중 하나로 추측할 수 있는 한 가지 변화가 눈에 보인다. 바로 공이 손에서 떠나는 릴리스포인트 높이의 변화다.

릴리스포인트 높이는 투수의 피로가 누적되거나 컨디션이 나쁠 때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올해 복귀전을 치른 류현진(LA 다저스) 역시 한창 전성기였던 2013년에 비해 복귀전의 릴리스포인트 높이가 꽤 낮았다.

지난해 아처의 릴리스포인트는 시즌이 흘러가면서 점점 낮아져갔다. 가장 높이가 낮아진 9월과 10월에는 ERA가 5.81로 떨어지는 큰 부진을 겪었다. 프로 통산 한 시즌 최다인 212이닝을 소화하면서 피로가 누적된 영향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올해는 시즌 초반부터 릴리스포인트 높이가 지난해 9월 수준으로 회복됐다. 컨디션이 작년 초반에 비해 나빴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를 반영하듯 제구력 난조는 7월 초까지 계속됐다. 7월 중순부터 릴리스포인트가 높아지자, 성적도 다시 좋아졌다. 결국 시즌이 흘러가면서 아처의 '투구 밸런스'가 정상 궤도로 올랐다는 얘기일 수 있다.

아주 미세한 변화지만, 그 미묘한 변화와 성적이 흡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만큼 투수가 '민감한 동물'이라는 감상도 가능하다. 사실 이제 와서는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아처는 이전의 강렬한 위압감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2016년 사이영 상의 주인공이 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2017년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투수 후보를 꼽는다면? 이번에도 아처의 이름을 후보에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박기태(야구공작소)



야구 콘텐트, 리서치, 담론을 나누러 모인 사람들. 야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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