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울퉁불퉁해 반지를 끼기 쉽지 않아요."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한국에 첫 메달을 안긴 여자 유도 48㎏급 은메달리스트 정보경(25·안산시청)이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여자의 손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거칠고 투박했다. 그의 손만 봐도 올림픽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한국 여자 국가대표의 손이었다.
여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꽃다운 시절. 예뻐지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하지만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는 태극낭자들에게 그런 여유는 없다. 그들에게 패션, 액세서리는 사치일 뿐이다.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올림픽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대신 피땀으로 얼룩진 그녀들의 몸엔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과 발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포기는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많은 종목의 태극낭자들이 태극마크를 위해 상처투성이를 자청했다. 본지는 '아름다운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을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22·연세대)는 발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한다. 지속적인 훈련과 시합으로 발이 많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슈즈를 신고하다보니 발 모양이 변형된다. 엄지와 검지를 빼고는 나머지 발톱이 계속 상한다"고 털어놨다. 펜싱 신아람(30·계룡시청)의 허벅지에는 선명하게 피멍이 들었다. 여자하키 한혜령(30·kt)은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포기한지 오래다. '배구의 신' 김연경(28·페네르바체)을 포함한 여자 배구대표팀은 손가락 부상을 달고 산다.
이들에게는 상처도 영광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자긍심은 높아진다. 이것이 한국 여자 국가대표 선수들이 사는 법이다.
153cm의 '작은 거인' 정보경은 손으로 말했다.
정보경은 지난 7일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여자유도 48㎏급에서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손가락 부상을 안고도 투혼을 발휘해 국민들을 감동시킨 주인공이다. 8일 만난 정보경은 "하루도 쉴 틈 없이 상대 도복을 놓지 않고, 나보다 무거운 상대를 들다보니 손이 이렇게 됐다"며 손을 보여줬다. 이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항상 아프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 반지를 크게 맞추거나 아예 끼지 못한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커플링도 해야 될 텐데…"라고 말했다.
긴 머리도 그에게는 사치다. 짧은 머리를 금빛으로 물들인 정보경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머리를 짧게 자른 뒤 점점 짧아지다가 숏컷이 됐다. 시합하다가 머리카락이 내려오면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라고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이유를 밝혔다. 물론 여자이기에 긴 머리를 향한 로망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긴 생머리를 해보고 싶지만, 2020년 도쿄올림픽 때까지는 꾹 참겠다. 이후엔 머리를 원 없이 기르겠다. 나도 시집을 가야 한다"며 해맑게 웃었다.
이날 만난 펜싱 신아람 허벅지에 새겨진 선명한 피멍은 그동안 수많은 경기와 훈련을 치르며 검에 찔린 자국이었다. 신아람은 "중2 때 펜싱을 처음 시작한 뒤 검에 처음 찔렸을 때 너무 아팠다. 갈수록 무뎌지더라. 요즘도 피멍이 들고 심하면 피가 나기도 한다"며 "쉬는 날에 치마를 입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긴바지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4년 전 런던올림픽에서 '1초 오심'으로 눈물을 흘렸던 신아람은 11일 단체전에서 금빛 찌르기에 나선다.
여자배구 레프트 김연경은 수만번 강스파이크를 때려 손이 성할 날이 없다. 세터 이효희(36·도로공사) 역시 "손가락 끝으로 공을 밀어야 해 손가락 관절염이 있다. 경기 뒤 찜질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센터 양효진(27·현대건설)도 "강한 공을 막다보니 손가락이 꺾이고 경기가 끝나면 퉁퉁 붓는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경기가 있으면 손톱을 안 기르고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는다"며 "휴가 때나 한 번씩 기분전환 삼아 매니큐어를 바른다"고 말했다. 일반 여성들에게는 일상이 국가대표들에게는 특별한 이벤트인 셈이다. 현재 리우 올림픽 여자배구 A조 예선에서 1승1패를 기록 중인 한국여자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이후 40년 만에 올림픽 메달을 꿈꾸고 있다.
여자하키 한혜령의 얼굴은 검게 그을렸다. 하루종일 땡볕에서 하키스틱을 들고 뛰고 또 뛰기 때문이다. 그의 오른쪽 눈두덩에 1cm 가량의 상처도 있다. 3년 전 상대가 때린 공에 얼굴을 맞아 네 바늘을 꿰맸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부러울 법도 하지만 한혜령은 "괜찮다. 도전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리듬체조 신화를 꿈꾸는 손연재의 발은 상처투성이로 유명한 발레리나 강수진(49)과 닮았다. 매트 위를 구르고 뛰어오르고 넘어지며 생긴 일종의 훈장과 같다. 손연재는 "발 모양이 변형되고 발톱이 상한다. 발목 부상을 달고 살아 인대, 아킬레스건, 발바닥도 계속 아프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또 "발을 보면 그냥 참 못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발가락이 나오는 신발을 잘 안 신는 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고1 때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 손연재는 매트에 러시아 선수들이 꽉 차 있어 매트 끝으로 밀려나 연습하기도 했다. 1년에 훈련비가 많게는 3000만원 정도가 들었다. 아파도 쉴 수가 없었다. 꾸미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시기였다. 손연재는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러시아에서 맨날 트레이닝복만 입다가 하루 예쁜 옷을 입고 시내에 나가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머리를 식혔다"고 며 "남자친구를 사귀는 친구들이 부럽지만 리우 올림픽까지 미뤄야할 것 같다"고 올림픽 첫 메달을 향한 의지를 드러냈다.
4년 전 런던올림픽에서 5위를 기록한 손연재는 이번 리우 올림픽이 마지막 무대다. 현재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전지훈련 중인 손연재는 아시아 선수 최초의 메달로 화려한 피날레를 꿈꾸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박린·피주영·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