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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잘 모르는 대만과 야구, 그 역사

입력 2016-07-12 07:01 수정 2016-07-12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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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동아시아에서 일본, 한국에 이어 세 번째로 프로야구리그를 출범시킨 나라다.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개최를 두고 한국과 경쟁했다 .대만의 수퍼스타 린즈셩은 지난해 KBO리그행을 타진하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 국제대회에서 대만은 한국 야구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지금도 한국을 최대 라이벌로 보고있다. 정작 한국에서 대만 야구는 큰 관심이 없다. 그래서 대만 야구가 갖는 한국에의 라이벌 의식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이유를 찾는다면, 대만인에게 야구는 그만큼 특별한 경기기 때문일 것이다. 이종성 한양대 교수가 대만의 역사 속에서 야구를 다룬 원고를 일간스포츠에 보내왔다.

국내에서 발간된 한 대만 여행 안내서가 언급하듯 대만은 ‘중국어를 쓰는 일본’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일본 기업의 광고, 일본 백화점과 일본 식당 등을 목격하면 대만에서의 일본의 영향을 쉽게 실감할 수 있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51년 간 일본의 식민지로 곡물생산과 경공업 단지역할을 했던 대만의 역사도 이를 일정부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장제스(將介石)가 일제와 치열하게 대립하다 결국 공산당에 밀려 중국 본토를 떠나 정착한 곳이 대만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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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야구의 개화를 도운 한국의 3·1 운동

대만에서 일본의 영향이 가장 짙게 나타나는 분야 중 하나는 야구다. 대만의 야구는 일제 식민통치 기간 중 일본에서 파견된 공무원, 기업가들의 자손을 일본 제국의 위대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인 학교부터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10년대까지 대만인들에게 야구는 그저 ‘침략자 일본’의 스포츠였다. 또한 유교사상이 깊게 배어 있던 대만 사회에서 야구는 언제 어떻게 공에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이 같은 대만 사회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19년 이후였다. 일본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일본이 강압적 식민지 통치 방식을 동화(同化)주의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이 시기가 일본 역사에 있어 양당체제가 확립되고 보통선거가 치러지는 등 근대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타이쇼(大正, 1911~1925)시기였다는 점도 여기에 힘을 보탰다.

일본은 1922년부터 대만인들이 일본인과 함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기 시작했고 1924년에는 대만의 모든 학교가 1년에 한 번씩 운동회를 치르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대만 전역의 학교에서는 야구가 성행했다. ‘위험한 침략자의 스포츠’ 야구가 대만 ‘모던 보이’들의 로망으로 서서히 탈바꿈하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지역적인 차이는 존재했다. 일본은 대만의 중심지인 타이베이를 축으로 한 북부에서는 대만인들의 야구 참여를 제한했던 반면 상대적으로 빈곤층 농업종사자들이 몰려 있었던 남부에서는 대만인들의 야구 참여를 제한하지 않았다. 일본은 대만 남부에 주로 많이 거주했던 원주민들을 폭력성이 강한 ‘미개인’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을 대일본제국의 일원으로 만드는 데에 야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만인 주도하에 야구 팀이 생겨난 곳도 원주민들이 많았던 남부지역이었다. 1920년대 초반 가오샤 지역에서 탄생한 한 팀은 곧 일본 총독부에 의해 능가오(能高)라는 이름을 얻게 됐고 원주민 선수들은 화리안(花蓮)농업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대만 순회경기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능가오 팀은 1925년 일본 총독부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 학교들과 원정경기를 펼쳐 3승 1무 4패라는 성적을 냈다. 일본 야구계는 능가오 팀의 선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팀 선수 가운데 무려 4명이 당시 일본 중등야구계의 명문인 헤이안(平安) 중학 야구부로 스카우트될 정도였다.

비(非)일본학교로 고시엔 대회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낸 지아농(嘉農)학교

매년 8월마다 일본 열도를 야구 열기로 뒤흔들고 있는 여름철 고시엔(甲子園) 전국고교야구 대회에서 준우승의 쾌거를 이룬 팀도 대만 남부에 위치한 지아이 농림학교(嘉義農林學校, 일본명 가기 노린 가코)였다.

지아농(嘉農)은 1931년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며 고시엔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1921년부터 만주, 조선 대표의 고시엔 대회 출전이 이뤄졌고 1927년부터 대만 대표의 고시엔 출전이 시작된 이래 일본 본토 팀이 아닌 팀으로서는 사실상 최고의 성적이었다. 물론 1926년 고시엔 대회에서 만주 대표 다롄(大連)상업학교도 준우승을 기록했지만 당시 다롄 상업학교는 선수 전원이 일본인이었다.

반면 1931년 준우승을 기록할 때 지아농은 원주민, 본성인(本省人: 명말청초시기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대만으로 이주한 중국인)과 일본인의 혼합 팀으로 대만은 물론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지아농은 대부분 대만 학교 야구 팀의 출발이 그렇듯, 야구를 좋아하는 일본인 교사에 의해 야구부가 창설됐다. 1928년 창단한 지아농의 야구가 급성장한 계기는 야구 명문 와세다 대학교 출신의 콘도 효타로가 감독으로 부임해 오면서부터였다. 스파르타 식 훈련으로 정평이 난 콘도 감독은 일본선수와 대만선수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오직 승리만을 위해 매진했던 콘도 감독은 재능 있는 선수라면 누구라도 야구부 가입을 허락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원주민, 본성인, 일본인이 섞여있는 팀이 완성됐으며 팀의 주축은 본성인과 원주민이었다.

1931년 지아농이 고시엔 대회 결승에 오르자 많은 대만인들은 전파사 앞에 모여 라디오 중계를 들었다. 하지만 지아농은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여름철 고시엔 대회 3연패를 이룩하는 주쿄(中京)상업학교에 4-0으로 패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미 세 경기를 완투했던 지아농의 에이스 우밍제는 결승전에서 특유의 제구력을 발휘하지 못해 분루를 삼켰다.

하지만 지아농의 쾌거는 대만에게 야구로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일본 제국의 스포츠인 야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식민지 대만에 확실하게 정착해 일본의 식민지 동화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1931년부터 일본 야구계까지 인정한 명문 팀으로 자리매김한 지아농은 1936년까지 여름철 고시엔과 봄철 고시엔(센바츠)을 합해 모두 5번이나 출전했고, 훗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에서 대활약하며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우창정(吳昌正, 일본명 고 쇼세이)과 같은 일본 프로야구의 대스타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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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J-Photo DB

국민당 장제스 총통은 왜 야구를 홀대했나?

급속도로 성장하던 대만 야구는 1949년 공산당에 밀린 장제스와 그를 따르는 많은 외성인(外省人)들이 중국 본토에서 이주하면서 잠시 휴화산이 됐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은 식민통치 시절 남아있던 일본 잔재를 지우고 중국 전통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본성인과 원주민들이 가꿔 온 대만의 정체성 또한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 시기에 중국 본토를 떠나 대만에 정착한 외성인들에게 야구문화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중국 본토에서 경험했던 축구나 농구 문화에 훨씬 익숙해 있었다.

축구와 농구는 대만에 세워진 국민당 정권의 정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했으며 해외에 퍼져 살고 있던 중국 화교계의 지원을 이끌어 내는 유용한 창구였다. 주로 홍콩 출신 선수들로 이뤄진 대만 축구는 1954년과 1958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1948년과 1960년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농구도 1954년과 1958년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대만 국민당 정부에 중요한 스포츠는 이처럼 축구와 농구였으며 야구는 뒷전으로 밀렸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23년 설립된 대만 야구의 성지인 위안샨(圓山)경기장이 1951년부터 미군사지원고문단(MAAG) 본부로 사용된 사례다. 이후 1989년 위안샨 야구장은 종샨(中山) 축구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대만 야구 붐 재점화 시킨 리틀 야구

축구, 농구에 밀려 있던 대만 야구가 다시 부흥기를 맞이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이미 1962년 아시안게임에서 개최국 인도네시아의 친 중국 노선으로 출전하지 못하는 등 국제 스포츠계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 대만은 1970년대 초반 미국과 중국의 관계개선으로 위기를 맞게 됐다.

이 와중에 다양한 원주민들이 모여 살던 대만 동부 타이동 현에 위치한 홍계(紅 葉)초등학교가 대만 야구 붐을 재점화 시켰다. 빈촌에서 자라난 원주민 아이들의 꿈을 이루게 해 준 홍계 초등학교 야구 팀은 1966년 대만 유소년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홍계 초등학교 선수가 주축이 된 대만 연합팀은 1968년 일본 간사이 지방 대표 팀을 5-1로 제압하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국민당 정권은 이 경기를이례적으로 TV 생중계 하도록 했으며 대만인들은 이 경기를 통해 일본을 이겼다는 국민적 만족감에 빠졌다. 이 쾌거를 계기로 대만은 미국에서 펼쳐지는 세계리틀야구대회를 목표로 진격해 1969년부터 1981년 까지 무려 10번의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아마추어 야구는 쿠바, 리틀 야구는 대만’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도 이 때부터다.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리틀 야구. 하지만 리틀 야구는 대만으로서는 매우 중요했다.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대만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대만 중앙은행은 1999년 자국 500위안 지폐에 도안돼 있던 장제스 총통 대신 한 리틀 야구 팀을 새겨 넣었다. 원주민들이 주축을 이뤄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한 난왕(南王) 초등학교 야구팀이었다. 또한 같은 해 대만의 금마장 영화제에서도 홍계 초등학교 야구 팀을 주제로 한 영화가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새로운 대만 국가주의를 상징하는 두 가지 사건은 일제강점기부터 본성인과 원주민이 일군 대만 야구에 대한 헌정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이는 정치적으로 본성인 지식층의 지지를 받는 민진당이 2000년 국민당 장기집권으로부터 정권을 획득하게 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종성(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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