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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텔링] "널 위해 튼 가습기에 널…엄마는 10년째 죄인의 마음"

입력 2016-03-17 01:42 수정 2016-05-03 07:38

2006년 생후 23개월 된 준호군
폐섬유화로 투병 후 세상 떠나
아이모습 사진에 담기 가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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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생후 23개월 된 준호군
폐섬유화로 투병 후 세상 떠나
아이모습 사진에 담기 가슴 아파

준호야! 엄마다. 네가 2006년 6월 4일(당시 23개월) 세상을 떠난 뒤 엄마는 10년 가까이 죄인의 심정으로 살고 있다.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 버린 것도 억울한데 가해자 측의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 없이 너의 죽음이 잊혀 가는 현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최근 검찰이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진실 규명에 나서면서 희망이 생긴 건 그나마 다행이다.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엄마는 요즘 부쩍 자주 그때의 ‘병상 일기’를 들춰 본단다. 조용히 병원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네 옆에서 하얀 종이 위에 미안한 마음을 토해내던 시간들이었지. 일기를 처음 쓴 건 응급실에 온 지 13일째 되는 날이었어. 네가 두 번째로 맞은 어린이날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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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호군의 어머니 부은정씨가2006년 어린이날에 쓴 병상 일기. [글·그림 부은정씨]

너와 함께 웃으며 보내야 하는 어린이날, 자식을 건강하게 키우지 못한 엄마를 용서해줘. 엄마가 좀 더 (가습기살균제에 대해) 공부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2006년 5월 5일자)
폐섬유화(폐 조직이 딱딱하게 굳는 증상)란 녀석이 우리 준호를 많이 괴롭히는구나. 산소포화도가 많이 떨어졌다가 이제야 조금 회복된 것 같다. 준호야, 조금만 더 힘을 내.”(5월 13일)

엄마가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가 시판한 가습기살균제 ‘옥시싹싹 가습기 당번’을 처음 접한 건 2005년 10월께였어. 대형마트에서 곰팡이· 세균 제거 등의 효과가 있다는 제품 표시 광고를 봤지. ‘참 신통한 제품’이라 생각했어. ‘인체에 무해하다’고 쓰인 문구도 굳게 믿었단다. 준호가 첫아이였던 만큼 엄마·아빠는 생활환경에 각별히 신경을 썼어. 가습기 물을 교체할 때마다 살균제를 권장량(10~20ml)만 넣었지.

네 침대 바로 옆에 가습기를 놓고 겨우내 밤부터 아침까지 틀었어. 이듬해 4월부터 너는 기침을 자주 하기 시작했어. 방 안 습도가 낮아 감기에 걸린 거라고 생각했지. 가습기를 자고 있는 네 얼굴 쪽으로 가까이 댔단다. 너를 위한다고 그랬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네 입술이 퍼렇게 부어올랐어.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지. 담당 의사는 “이런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이 최근 많이 들어왔는데 10명 중 6명꼴로 사망한다”고 했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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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부은정씨. [중앙일보]

준호야. 비가 많이 와. 이런 날이면 엄마랑 너랑 창밖을 보곤 했었지. 곧 있으면 준호가 우산도 쓰고 다닐 수 있겠지?”(5월 22일)
요즘 엄마는 매일 네 눈꺼풀을 만져. 너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서. 거의 한 달 동안 우리 아들을 안아보지도 못했네. 이젠 준호랑 매일 얼굴을 마주치려고. 우리 준호는 입으로 먹지도 못하는데 혼자서 밥 먹으니 미안하다.”(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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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양준호군의 어머니 부은정씨는 아픈 아들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글·그림 부은정씨]


그때까지도 엄마는 희망을 잃지 않았어. 주변에선 “혹시 모르니 아들 사진을 많이 남겨 놓으라”고 했지만 의료장비들이 붙어 있는 너의 모습을 차마 사진으로 남길 수 없더라. 대신 스케치북에 자고 있는 네 모습을 그렸어. 그림을 병실 한쪽에 걸어두고 다음 어린이날엔 손을 꼭 잡고 놀이공원에 가겠다고 다짐했지.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어.

네가 세상을 떠나고 엄마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모임에 가입했어. 다른 피해자들의 사연을 듣고 전국에 ‘또 다른 준호’가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랐단다. 오모(31)씨는 2011년 아내와 아들을 동시에 잃었어. 첫째 아들 역시 ‘간질성 폐질환’으로 1등급 피해자 판정을 받고 약봉지를 달고 살고 있대. 부산에 사는 박나원(5)양은 생후 14개월 때부터 목에 구멍을 뚫고 플라스틱 관으로 숨을 쉬어.

총 1484명의 피해자 중 숨진 226명(환경보건시민센터 접수 기준)을 제외한 나머지 산 사람들은 하루하루 감당키 어려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세월호 참사 못지않게 엄청난 일인데 지금까지 배상은커녕 수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산업통상자원부·환경부·보건복지부 등 관계 부처들은 “제품 출시 당시엔 관련 규정이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어. 그동안 제조사가 받은 처벌이라곤 허위 과장 광고로 인한 과징금 5100만원이 전부야.

최근 엄마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또 들었어. 검찰이 제조사들에 살인 혐의가 아니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공소시효 7년)를 적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그럼 우리 아들의 죽음은 누가 책임진다는 거지? 엄마는 15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했어. 너가 세상을 떠난 마지막 날의 일기 내용을 떠올리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만 담았다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엄마에게 태어나렴! 영원히 미안하고 사랑한다. 아들아! 엄마·아빠를 잊지 마!”(6월 4일)

장혁진·정혁준 기자 analog@joongang.co.kr

※고(故) 양준호군의 어머니 부은정(44)씨 등 피해자 유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부씨 시점에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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