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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

입력 2015-05-15 00:03 수정 2015-05-28 14:09

3·1운동, 6·25, 5·18 … 근현대사 100년 흔적 오롯한 ‘예술가 아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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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6·25, 5·18 … 근현대사 100년 흔적 오롯한 ‘예술가 아지트’



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


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


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


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


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


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


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



광주 양림동 둘레길은 좁은 골목을 헤집으며 광주의 지난 백 년을 만나는 길이다. 사진은 지역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꾸민 펭귄마을.


광주광역시 양림동은 면적 0.68㎢에 불과한 조그만 마을이지만,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양림동은 광주의 근대화가 시작된 곳이다. 20세기 초 외국 선교사가 터를 잡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마을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은 3·1운동부터 6·25, 그리고 5·18까지, 숫자만 표시해도 알 수 있는 우리네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두루 겪었다. 그 흔적이, 그러니까 지난 백 년의 세월이 이 작은 마을에 오롯이 남아 있다. 양림동은 예향(藝鄕)이기도 하다. 수많은 문화 예술인을 낳았고, 지금은 젊은 예술가의 아지트로 거듭나고 있다. 하여 양림동 둘레길을 걷는 건 시간여행이었고, 동시에 아트 투어였다.


100년 묵은 한옥의 운치


윌슨 선교사가 살던 사택. 마당에는 미국에서 가져온 키 큰 나무가 심어져 있다.


양림동에도 둘레길이 있다. 여느 둘레길처럼 산자락을 에두르는 길은 아니다. 양림동의 문화, 역사 유적을 둘러보는 도심 속 4.5㎞의 골목길이다. 2010년 양림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조성했다. 한데 똑 부러지는 길이 아니다. 점점이 흩어진 수십 개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길이어서다. 하여 길 이름이 적합한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주민도 이름을 헷갈려 한다. '양림길' '양림동 근대역사문화 탐방길' 등 여러 이름이 떠돈다.

이름이야 어떻든 양림동은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야 제맛이다. 여행자는 지도를 들고 저마다 선을 그리며 골목을 헤집고 다닌다. week&은 주민자치위원회가 조성한 길을 참고했지만, 실제로 걸은 길은 조금 달랐다. 길이 처음 생겼을 때보다, 볼거리가 늘었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양림 오거리로 잡았다. 서서평길을 따라 얕은 오르막을 오르니 근사한 고택 한 채가 보였다. 조선 말기인 1899년에 지은 가옥으로, 1965년에 집을 매입한 주인의 이름을 붙여 '이장우 가옥'으로 부른다. 남도의 전통 가옥과 달리 'ㄱ' 자 형인데다 창살에 유리를 덧댄 모양도 독특했다. 초등학생들이 마당에 있는 우물 펌프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었다.


김현승 시인을 추억하는 '다형다방'. 방문객이 직접 차를 타 마시는 무인 카페다.


이장우 가옥에서 북쪽으로 170m쯤 걸으니 최승효 가옥이 나왔다. 1920년 독립운동가 최상현이 지은 집인데 65년 최승효 광주MBC 창립자가 매입했다. 지금은 설치미술가인 아들 최인준씨가 작업공간으로 쓰고 있다. 기본 골격은 전통 한옥이었지만 안채를 덮은 주황색 기와와 아담한 연못은 이국적이었다. 뒤뜰에는 아담한 산책로가 있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무등산이 액자 속 그림으로 들어왔다.

최승효 가옥을 나와 광주천 방향으로 조금 더 걸으니 동굴이 나왔다. 알고 보니 일제가 만든 방공호란다. 양림산(108m) 동쪽 끝자락에 호가 4개 있다. 그 중 하나를 관람객에게 개방한다. 이름은 '뒹굴동굴'인데 깊이가 약 20m로 깊지 않았다. 또 다른 방공호는 해설사 조만수(57)씨가 창고처럼 쓰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더위를 피하러 많이 왔어요. 김치나 장류를 저장하는 냉장고 역할도 했지요."


버려진 땅을 찾아온 작은 예수들


1920년에 지은 최승효 가옥. 개화기 한옥의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뒹굴동굴 옆 양림파출소를 지나 양림산 오르는 길로 들어섰다. 양림동 둘레길에서 가장 우거진 숲길이 이어졌다. 아담한 정자 양파정을 지나 1㎞쯤 걸으니 사직공원 전망 타워가 나왔다. 양림동과 무등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이었다.

양림산 남서쪽으로 이어진 길은 기독교 순례길이라 할 만했다. '광주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이곳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초 호남 지역에 기독교가 유입된 과정을 알 필요가 있다. 파란 눈의 선교사들은 나주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유교 문화가 강해 쫓겨나다시피 광주로 왔다. 그들은 광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 성읍 밖 양림산 기슭의 풍장 터였다. 몹쓸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의 시신을 내다버리는 곳이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전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학교를 지어 근대 교육을 했고, 병원을 지어 아픈 이를 돌봤다. 그래서인지 양림동에는 선교사의 이름을 딴 길과 건물이 많았다. 지금도 양림동 주민 약 60%가 기독교인이란다.

사직공원 밑에는 충현원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고아를 돌보는 복지기관으로 쓰였던 장소다. 입구에는 미 공군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는 전쟁 고아 1059명을 살려낸 '어린이 비행기 수송 작전'을 지휘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블레이즈델 대령이 평생 붙들고 산 성경 글귀였다고 한다.

충현원 옆 호남신학대학교 뒤편 언덕에는 아담한 묘원이 있었다. 양림동에서, 나아가 호남에서 생을 바친 이방 선교사의 묘지였다. 이끼 낀 자그만 묘비 22개가 소박했던 그들의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다시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으로 내려왔다. 이곳에는 선교사 사택이 몰려 있었다. 양림동에서 자란 김현승 시인을 기리는 시비를 지나니, 회색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이 보였다. 윌슨(한국이름 우일선) 선교사가 살던 집이었다. 집 주변에는 미국에서 옮겨온 피칸나무·흑호두나무가 있었고, 큰 은행나무에는 그네도 걸려 있었다. 영락없는 미국 가정집 풍경이었다. 그들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했을지언정 향수(鄕愁)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예술가 아지트로 바뀐 저항의 현장


지난 3월, 사직공원 팔각정을 허문 자리에 전망 타워가 들어섰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피터슨 선교사의 사택이 있었다. 그는 외국인 대부분이 광주를 떠난 80년 5월 마지막까지 시민과 함께한 선교사였다. 그리고 90년대까지 광주의 증언자로 활동했다. 양림동은 시민과 계엄군이 가장 격렬하게 맞섰던 구 전남도청에서 겨우 한 블록 떨어져 있다. 당시 양림동 광주기독병원(구 제중원)에서 부상자를 돌봤는데 시민이 줄지어 헌혈을 했다고 한다.

수피아여중·고 안 쪽으로 들어섰다. 학교 안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양식 건물 3채가 있었고, 어김없이 오래된 이야기가 서려 있었다. 3·1운동 당시, 수피아홀 1층에서 학생들이 교복을 찢어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둘레길은 대남로 방향으로 이어졌지만 week&은 양림동 안쪽 주택가로 방향을 틀었다. 예술가의 아지트로 떠오른 2015년의 양림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과연 골목에는 세련된 갤러리와 카페가 많았다. 재미난 벽화도 그려져 있었다. 서울의 서촌을 닮은 분위기였다. 갤러리 늘 최석현(59) 대표는 "양림동은 전통과 서양 문화가 공존하면서도 광주에서 발전이 가장 더딘 동네"라며 "예술가가 모이는 것도 그런 문화적 다양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피아여중·고에서 내려오는 길목에는 다형다방이 있었다. 다형(茶兄)은 커피 매니어였던 김현승 시인의 호다. 김현승 외에도 많은 문화예술인이 양림동에서 나고 자랐다. 소설가 황석영, 문순태가 집필 활동을 했고, 중국 혁명가를 지어 중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작곡가 정율성도 양림동 태생이다. 둘레길은 정율성 거리를 지나 오웬 기념각에서 마무리됐다. 걸은 거리는 약 4.5㎞로 짧았지만 반나절이 후딱 지났다. 역사책 수백 페이지를 단숨에 읽은 것처럼 어질할 정도였다.

양림동은 이제 뜨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서울 서촌, 전주 한옥마을에 견줄 관광지가 될 수도 있다. 광주시는 2009년 양림동을 '근대역사문화마을'로 지정하고 예산 307억원을 투자했다. 골목마다 공사가 한창이었다. 부동산 값도 들썩인단다. 문화재 정비나 관광객 편의를 위한 개선도 필요하다. 하나 느림보 마을이 질박한 제 매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이달의 추천 길' 5월의 주제는 '가족여행 길'이다. 온 가족이 담소 나누며 걷기 좋은 길 10개를 선정했다. <표 참조> 이달의 추천 길 상세 내용은 '대한민국 걷기여행길 종합안내 포털(koreatrail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걷기여행길 포털은 전국 540개 트레일 1360여 개 코스의 정보를 구축한 국내 최대의 트레일 포털사이트로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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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사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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