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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이브] "선거 초기, 돈봉투 대신 막걸리·고무신"

입력 2014-04-01 13:08 수정 2014-04-0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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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전우용 교수

◇정관용-6·4지방선거 후보군들이 드러나면서 갈수록 열기가 뜨거워져 가고 있죠. 따지고 보면 우리 선거 투표의 역사 얼마 안 됩니다. 오늘 역사 라이브 우리나라 초기 선거 이야기 좀 듣겠습니다.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전우용 교수 어서 오십시오.

◆전우용-안녕하세요.

◇정관용-조선 시대나 그 이전에도 선거나 투표 같은 게 있었습니까?

◆전우용-본래 선거라고 하는 것은 선발해서 기용한다, 뽑아 쓴다, 이런 개념이잖아요. 그래서 선거에는 두 가지 방식이 기본적으로 있었어요. 하나가 과거.

◇정관용-그건 시험이잖아요.

◆전우용-시범 봐서 뽑는 게 과거고요. 두 번째가 천거. 추천을 받아서 뽑는 게 천거죠. 그러니까 천거라고 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투표선거가 되겠고요. 그렇죠. 그래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도 이런 형태의.

◇정관용-투표가 있었죠.

◆전우용-그렇죠. 투표해서 선발하는 케이스가 있었고요.

◇정관용-그게 민주주의의 효시다 이렇게 불린 거죠.

◆전우용-조선 시대도 지방 향회라고 해서 마을 자치단체, 마을 공동체 같은 데서는 경우에서는 풍헌이니 집강이니 해서 우두머리를 뽑는데 다수결 원칙을 적용하는 사례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관용-그때는 어떻게 했을까요, 손들고 했을까요, 아니면?

◆전우용-언제나 그런 식의 천거나 어느 분이 덕망이 높고 경륜이 많으니까 그분이 적임자 아니겠느냐 그러면 만장일치 되는 경우도 있고 아니다, 그러니까 19세기, 18세기쯤 되면 향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런 자를 둘러싼 농촌 내부의 싸움도 치열했습니다.

◇정관용-권력이 있었나 보죠?

◆전우용-일단 예를 들어서 그런 데서 결정하는 것들이 어느 집에 먼저 모내기 해 줄 거냐 이런 것까지도 결정할 수 있는 거기 때문에 상당한 게 있었고요. 또 조선 후기, 말기가 되면 신분제가 변동이 되니까 전통적인 양반층하고 새로 납속이니 공명첩이니 사서 양반이 된 사람들하고 그걸 둘러싸고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관용-조선시대 그때는 아무리 향회 자치제라 하더라도 양반들만 투표했겠죠?

◆전우용-대개 그렇죠. 우리가 말하는 평등선거니 보통선거니 이런 원칙은 없었던 것이고요.

◇정관용-일제 시대에는 뭐 있었습니까?

◆전우용-3.1운동 이후 일본이 민심을 수습하는 방책으로 지방자치제라는 걸 들고 나와요. 그래서 이제 도, 부 그러니까 부라고 하는 게 현재 시에 해당하는데요. 협의회 이런 걸 만들어서 거기에 의원들을 선거로 뽑게 하는데 세금 많이 내는 사람한테는 특별권을 주는 제한선거였죠. 그래서 유권자 수를 보면 서울시민이 20만명 정도 됐었는데 1920년에 5000명 정도. 그런데 그 5000명 중에서도 한국사람 조선인은 1500명 정도, 일본인이 3500명 정도.

◇정관용-재산세 많이 내는 사람은 주로 일본이니까.

◆전우용-그렇죠. 그렇게 해서 의회를 구성해서 만들고 그렇게 투표했던 경험들은 있죠.

◇정관용-그건 한날한시에 하고 그랬어요?

◆전우용-그렇죠. 한날 날짜 잡아서 투표를 하고 사전에 유권자 세금 납세자 조사해서 유권자 확정하고.

◇정관용-전국적으로 한날한시에?

◆전우용-시도협의회기 때문에 전국은 아니고.

◇정관용-시도단위로?

◆전우용-단위로.

◇정관용-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뽑힌 사람들한테 권력은 별로 없었던 거예요?

◆전우용-주로 이제 의회에서 시정이나 도정에 대해서 자문하는 정도, 그런 정도였습니다.

◇정관용-그래도 투표가 있기는 있었군요. 부자 남성들, 주로 일본 사람. 해방되고 우리가 48년, 5·10총선거가 최초의 선거죠?

◆전우용-그렇죠. 보통 직접, 비밀, 평등이라고 하는 근대 민주주의 선거가 처음 시행된 것이 그때인데. 남녀차별도 없이요.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여성 참정권이 허용된 게 1946년이에요.

◇정관용-46년? 우리보다 딱 2년 앞섰네요.

◆전우용-그렇죠. 프랑스 대혁명부터 여성 참정권이 시작된 건데.

◇정관용-대혁명은 1789년인데.

◆전우용-거의 150년, 160년 가까이 지난한 여성참정권 획득 운동의 역사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야말로 민주주의라는 말도 모르던 사람들한테 갑작스럽게 투표권이 생긴 거예요. 이걸 어떻게 써야 될지도 몰랐던 거고요. 이게 뭔지, 민주주의라는 말은 쓰는데 그때까지 수천 년간 왕조국가, 그다음에 식민지하에서 의의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낯선 거 였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한 굉장히 귀중한 거다. 이게 피땀 흘려 얻은 것이다, 이런 생각이 없었던 거죠.

◇정관용-그래서 참 웃지 못 할 모습들이 펼쳐졌겠죠, 초기에.

◆전우용-그렇죠. 그러니까 이게 그냥 먹는 걸로 바로 대체되는 그런 인상들을 가진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구든 막걸리 한사발이라도 더 주는 사람 찍는다.

◇정관용-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

◆전우용-그러니까 50년대까지, 60년대까지 사실 선거철이 되면 마을 잔치인 거죠. 농촌에서의 마을 잔치이고 도시에서도 평소 못 먹던 것 먹어보고, 뭐라도 챙겨보고.

◇정관용-70년대, 80년대에도 돈 봉투 많이 돌렸죠.

◆전우용-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선거날 아침인데 대학 다닐 때인데 집 마당에 아무것도 안 써 있는 흰 봉투에 돈 5000원 들어 있는 거 본 기억이 있습니다. 누가 줬는지는 알죠. 아는데 증거는 없는 그런 돈들이 돌아다니고는 했었죠.

◇정관용-대학 다니실 때면 80년대?

◆전우용-80년대.

◇정관용-아무튼 48년도 50년도 당시 투표소는 어땠고 후보들은 어떤 사람들이 나왔고?

◆전우용-처음 선거에 좀 마을의 번번한 금융 조회당이나 학교가 있으면 선거를 했고요. 그런 게 없는 마을에는 유지 집 하나 빌려서 했던 것이고요.

◇정관용-개인 집에 가서?

◆전우용-그렇죠. 그런 다음에 대개 이제 한자로 이름들을 쓰고 그러는데 한자에 관한 문맹이 거의 90% 육박을 했어요.

◇정관용-한글도 못 읽는 분들이?

◆전우용-많았고요. 그다음에 아라비아숫자도 모르니까.

◇정관용-1234도?

◆전우용-그러니까 기호를 작대기 개수로 말하는 거죠. 작대기 하나, 작대기 둘이다 해서 하나, 둘짜리 자기가 보고 기표하는 이런 방식이었고요. 이건 요즘 투표함, 투표소 개량소 문제가 얘기가 나오고 하는데 대략 비밀투표 원칙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물어보기도 하고 별별 일들이 다 있었을 거예요.

◇정관용-투표소 현장에서 옆에 사람한테 물어보고?

◆전우용-그렇죠. 누가 누구냐. 작대기 두 개라는데 이상하게 보인다, 이런 얘기들도 하고 그랬겠죠. 그러니까 초기 투표는 이렇게 우리가 엄밀하게 진행됐다, 이렇게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정관용-그렇죠. 후보자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 나왔어요?

◆전우용-통계상으로는 무직, 농업 이런 직업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좋은 직업들은 다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다 막 떠난 다음이라 독립운동 했던 분들도 무직이죠. 독립 운동가들도 있고 또 지역에서 독지가 했던 분들도 있는데 좀 많은 분들이 금융조합이라든가 부자집, 지줏집 자식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특히 구전으로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양조장집 아들이나 조카들이 당선이 많이 됐다고 그래요.

◇정관용-양조자집 아들? 제일 부자죠, 사실.

◆전우용-시골에서 제일 부자고.

◇정관용-막걸리 주기 좋고.

◆전우용-그렇죠.

◇정관용-주로 전 교수님 말씀을 제가 듣는데 제가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제 고등학교 때 은사선생님이 50년대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셨던 분이에요. 50년대 서울대생들은 선거 때가 되면 지방을 다니면서 계몽활동을 했답니다. 투표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려주고 그러면서 은근히 이승만 대통령 그 당시 동제 하니까 야당 찍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시골 계신 분들이 번듯한 서울대 학생들이 왔으니까 극진히 대접하고 다 얘기를 듣고 자네 말이 다 맞네, 정말 말도 잘하고 맞다. 그런데 이 사람 어떻게 왕을 가나, 이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개념이 없는 거죠.

◆전우용-그전까지만 해도 4.19 때 발포명령을 했던 책임자가 되서 최인규 당시 내무장관이 사형을 당했단 말이에요. 기자들이 그 집에 찾아간 거예요. 아들이 사형 당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아버지한테. 그런데 그분 아버지가 그랬다는 것 아닙니까? 임금께 충성하다가 역적들에게 목숨을 잃었으니 내 아들은 충신이다. 그런 식의 의식이 6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거죠.

◇정관용-그래요. 투표를 통해 정권을 바꾼다 이게 아니라 이 사람은 왕이다, 이게 안 맞는 개념이 통용됐던 시절이로군요. 요즘도 황당하고 이상한 공약 많이 등장을 합니다. 과거 공약 좀 재미있는 거 몇 가지 짚어볼까요? 의미 있는 것들.

◆전우용-말씀드렸다시피 40년대, 50년대 초까지는 공약이라는 하는 게 거의 없었던 상황이고요. 56년 선거부터 공약다운 공약이 나오는데 그 공약을 처음 제대로 된 공약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공약10장이라는 것을 낸 분이 당시 진보당의 조봉암 씨였어요. 10개를 냈는데 다 말씀드릴 수 없고 대표적인 게 평화통일하자. 그때까지는 무역통일이 기본 이였었는데 평화통일하자. 계획경제 하자.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자, 초중고등 교육을. 그리고 서민생활을 옥죄는 여러 가지 규제를 철폐하자. 이런 공약을 내세웠거든요.

◇정관용-정말 좋은 공약들이네요.

◆전우용-지금은 상식화 됐고 사실 평화통일이나 계획경제 같은 계획적 개념을 경제에 도입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상식화되어 있고 또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진행됐던 거고요. 그런데 이게 조봉암 씨를 공산주의적이다 또는 공산주의를 경배한다고 해서 사형으로 몰아간 일이죠.

◇정관용-평화통일 얘기해서 사형 당했죠.

◆전우용-계획경제도 마찬가지였고요. 지금 무상급식이라든가 이런 대목이라든가 규제철폐, 서민규제철폐가 아니라 기업규제철폐가 바뀌기는 했습니다마는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공약이 선구적으로 나왔던 거죠.

◇정관용-선구적인 공약이었다. 결국 어떻게 보면 미래세대를 예측한 그런 거네요?

◆전우용-그런데 그게 용납되지 않은 상황이 50년대까지였다는 거죠.

◇정관용-조봉암 씨 말고 다른 미래세대를 미리 예측한 공약 또 없습니까?

◆전우용-그 이후에 사실은 조봉암 씨 공약은 그분은 비록 사형 당했지만 이후 역대 대선에서 자주 나왔죠. 농업촌 고리채 탕감이라든가 이런 건 계속 나왔던 거고 흥미 있는 공약은 71년 선거 때 당시 3위를 했던 칼루이스로 유명한 진복기라는 분이 있죠. 그분이 전쟁을 일으켜서 무력통일을 하겠다, 이건 아주 쇼킹한 공약이었는데 그보다 흥미로운 게 신안 앞바다에 보물이 있다, 그거 찾아서 온 국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이런 공약을 했어요.

◇정관용-아, 그래요? 진짜 찾았잖아요.

◆전우용-보물섬을 찾았죠. 온 국민이 부자 될 만큼 보물은 아니었지만 그런 공약이 있었고요. 그다음에 87년 선거 때나 이럴 때는 군소후보들 사이에서 당시 종교정당들이 몇 개 나왔었는데 예수님에게 기도를 해서 남북통일을 이루어주겠다, 이런 공약도 있었고요. 우리가 좀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실 공약이 많이 남발되는 건 오히려 그 이후였던 것 같아요. 민주화 이후에 남발되면서 유명했던 것이 정주영 후보의 아파트 반값에 살게 해 주겠다 또는 본인이 당시 한국 제1위의 재벌이었었는데 재벌 폐지하겠다, 이런 게 있었고요. 최근에는 전임 이명박 대통령이 연 7% 성장, 국민소득 4만 불 달성.

◆전우용-747.

◇정관용-세계 7위 경제대국 만들어주겠다. 이런 공약들이 실은 굉장히 인상적이기는 했는데 좀 냉정하게 따져보면 실현 가능성이 애초에 없었던 것 아니냐. 이런 평가를 받은 공약들이었겠죠.

◆전우용-그리고 정말 황당 공약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허경영 씨 아니겠습니까?

◇정관용-그렇죠. 결혼하는 커플들한테 남녀 각각 5000만원씩 1억 원을 지급하겠다든가 신안 앞바다에게 200개를 지어서 세계 금융타운을 만들겠다든가 노인들에게 70만원씩 지급하겠다든가 정말 슈퍼맨이 아니고서는 실현할 수 없는 공약들이었는데 사실 그런 공약은 유권자들이 다 거짓말인 줄 아니까 농담인 줄 아니까 황당 공약으로 애초에 넘어 가는데.

◆전우용-진짜 문제는.

◇정관용-될 듯 될 듯 하면서 그거죠.

◆전우용-안 지키는 공약들이 문제인 거죠. 그런 공약들은 애매한 거죠. 판단하기도 어렵고.

◇정관용-사실 역대 대통령 보면 김영삼 대통령도 쌀개방 막겠다고 공약했는데 결국 쌀개방 했어요. 김대중 대통령도 농가부채 탕감한다고 했는데 결국 또 못했고요.

◆전우용-그다음에 노무현 대통령은 농업관련 예산을 국가예산에서 10%로 올리겠다, 그렇게 했는데 결국 또 못 지켰고요.

◇정관용-이명박 대통령은 아까 얘기했고.

◆전우용-747공약이요.

◇정관용-박근혜 대통령도 벌써.

◆전우용-벌써 공약 취하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기초노령연금 관련이라든가 복지 공약이 많이 후퇴했다 또 경제민주화 공약이 많이 후퇴했다, 이런 비판 나오고 있고요, 벌써 1년 정도 된 시점에서. 그러니까 공약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려면 무슨 말인들 못 하냐 그런 말씀을 하셨고 최근에도 김무성 의원께서 그런 얘기를 하셨죠. 비슷한 취지의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은 주로 읽은 것 뿐 이고 다 몰랐다, 이런 취지의 얘기들을 하셨기 때문에 사실은 공약을 하는 쪽에서나 또 받아들이는 쪽에서나 왜냐하면 좀 엄밀하게 공약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정관용-그래서 공약을 빌 공자 공약이라고도 하고 야시장 금반지라고도 부릅니다. 그냥 볼 때만 금처럼 보이는 이렇게. 따지고 보면 선거 투표의 역사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지키지 못할 공약 내놓고 또 거기를 믿고 찍어 주고 그냥 못 지키면 그런가 보다 하고. 이 문화는 아직도 안 바뀌고 있네요?

◆전우용-이게 이제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것, 또 투표역사가 짧은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기는 해요. 그런 면도 있고 또 어쩌다 보니까 어자피 안 지키는데 허무주의랄까요? 어차피 안 지키는데 하는 말 믿을 게 뭐 있냐? 이런 식의 풍토가 있는 것 같고요. 그보다도 특히 지방선거나 국회의운 선거에서 많이 나오는 공약들이 60년대 개발시대 이후에 주로 토건개발 공약 이었어요.도로 닦아준다, 다리 놔준다, 또는 가장 대표적인 게 뉴타운 공약 같은 거였죠. 대부분 오히려 서울시의 애물단지 골칫거리가 되어 있는 상황인데요.

◇정관용-이제는 개발시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전우용-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민들은 그거에 환호하고 열중하고 있는데 본질상 보자면 이게 고무신 선거나 막걸리 선거와 다르지 않거든요. 뭐 먹을 거 있으면 하나라도 더 먹을 것 주는. 한 푼이라도 더 얹어주는 후보 찍어주겠다, 이런 개념인 것 같아요.

◇정관용-알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전 교수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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