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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잊혀진 영웅 여성첩보원 "피란민 위장, 북 침투해…"

입력 2013-09-29 20:59 수정 2013-10-21 10:26

6000명 참전…20%는 여자 첩보원, 적진 활동…아군 공격에 희생되기도
첩보 부대의 비운…남은 기록 거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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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명 참전…20%는 여자 첩보원, 적진 활동…아군 공격에 희생되기도
첩보 부대의 비운…남은 기록 거의 없어

[앵커]

이틀 뒤면 국군 창설 65주년, 국군의 날입니다. 올해는 정전 60주년이기도 한데요, 6.25 당시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적진에 뛰어든 여성들이 있습니다. 바로 미군 소속 첩보 부대원들인데요,

잊혀진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를, 김상진 기자와 문호기 피디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인천에서 16km 정도 떨어진 등대섬 팔미도.

6.25의 전세를 뒤집은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의 전초 기지입니다.

지난 14일, 백발이 성성한 58명의 참전자가 이 섬을 찾았습니다.

[김덕준/KLO 전우회 회장 :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하면서 맥아더 사령관의 극비 지시로 등대 탈환 및 점등에 필요한 공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치열한 싸움 끝에 북한군을 물리치고 되찾은 팔미도 등대.

이튿날 새벽, 261척의 연합군 함선은 등대 불빛을 길잡이 삼아 인천 해안을 휩쓸었습니다.

연합군 팔미도 탈환 전투의 주역은 바로 한국인이었습니다.

미 극동군사령부가 극비리에 운영하던 한국인 첩보부대, 이른바 켈로(KLO)부대 요원들이 그 주인공.

KLO는 'Korea Liaison Office'의 약자로 한국 연락사무소를 뜻합니다.

1948년 신탁통치를 하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첩보 작전을 위해 미 극동군사령부가 만든 부대입니다.

[양욱/한국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 : 군사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 없이는 작전을 구상할 수도 없고, 실행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첩보부대였던 만큼 켈로부대의 행적은 아직도 상당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전사하면 새 요원을 뽑는 방식으로 모두 6000명 정도가 참전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중 20% 정도가 여성 첩보원이었습니다.

[더글라스 딜라드/전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장교 : 여성들에게 북한 땅에 낙하산으로 침투하는 훈련을 시켰어요. 정말 잘 해냈어요.]

취재진은 잊혀진 한국의 여성 첩보원을 직접 찾아나섰습니다.

78살 심용해 할머니는 16살의 나이에 미군을 따라나섰습니다.

[심용해/6·25 당시 첩보원 : 내가 입대할 때, (함께 간) 선배들이 나보다 세살 많고, 네살 많고, 다섯살 많고…이런 사람을 30명을 데리고 간 거야. 다 죽었어. 진짜 죽으러 가서 다 죽었는데, 나만 산 거야.]

어렸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자진 입대한 심 씨는 미 육군 25사단에 배속됐습니다.

피란민 복장으로 중서부 전선의 적진에 들어가 병력 규모와 화기 배치 등 각종 정보를 머릿속에 넣어오는 게 임무였습니다.

[심용해/6·25 당시 첩보원 : 가서 보는 건 다 머리에 넣고 와야 돼. 무슨 부대가 있더라. 거기에 몇 명쯤 있더라.]

적진에서 활동하다 보니 아군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용해/6·25 당시 첩보원 :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면서 이렇게 돼. 그래서 엎드리라는 거야. 왜? 등, 허리, 머리만 맞지 않으면 죽지 않으니까…]

88살 김영옥 할머니는 명문인 평양 서문여고를 나온 재원이었습니다.

한때 김일성보다 당서열이 높았던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두봉의 비서로 발탁된 뒤,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영옥/6·25 당시 첩보원 : 문서를 건네지는 못 해요. 구두로만 다 했지. 깊숙이 있었죠. 아무거나 빼내라면 다 빼낼 수 있었지.대동교가 이렇게 있으면 탱크가 지나가는데 여기 한 대, 여기 한 대, 이렇게 해서 밤에 내내 그렇게 움직였어요.]

평양에 잠입한 켈로 요원의 설득으로 남한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김영옥/6.25 당시 첩보원 : 대동교가 이렇게 있으면 탱크가 지나가는데 여기 한 대, 여기 한 대, 이렇게 해서 밤에 내내 그렇게 움직였어요.전쟁 준비하느라고…(그런) 전쟁 정보를 내가 주고…]

김 씨는 1.4 후퇴 무렵, 미군 트럭을 타고 가까스로 탈출했습니다.

[김영옥/6·25 당시 첩보원 : 겨우 건너왔어요. 정보원이어서 왔지, 민간인은 일절 그때만 해도 못 왔어요.]

[앵커]

네. 그럼 취재기자와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김상진 기자, 켈로부대가 적진에 침투하는 첩보부대라면 희생자도 많았겠어요.

[기자]

예 그렇습니다. 모두 6천명 정도가 투입됐는데, 이 중에서 무려 5천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다섯 명 중 네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겁니다.

[앵커]

여성 대원이 20%나 차지했다는 게 놀랍네요.

[기자]

아무래도 여성이 피란민 사이에 섞이면 적의 의심을 피하기 쉬웠기 때문인데요. 소년과 노인 심지어 임산부까지 자원해 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 함께 보시죠.

+++

방한복을 입고 소련제 기관단총을 맨 세 남자, 중공군으로 위장한 켈로 부대원입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에 투입되기 직전 얼굴을 남겼습니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사진입니다.

기밀 유지가 생명인 첩보부대 특성 상 켈로부대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남정옥/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첩보라는 건 당시에는 모두 비밀이죠. 적이 알아서도 안 되고. 켈로 부대원들은 어떻게 보면 나타나지 않은 영웅들이죠.]

당시 활동 근거지는 서울 인사동 일대. 여기서도 자취를 찾기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김상기/KLO전우회 사무총장 : 당시엔 이런 고층 건물이 없었어요. 이 자리에 5층 건물이 있었는데, 옛날 남조선 전기회사 건물이에요. 그걸 사령부에서 징발해서 본부로 쓴 겁니다. 여기서 첩보교육 시켜서 공수 투하해 대북 첩보 수집, 아니면 선박 태우고 잠입시킨다든가…]

켈로부대가 건진 아군 목숨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더글라스 딜라드/전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장교 : 중공군이 북한으로 들어오고 있단 확실한 첩보가 보고됐습니다. 한 대원이 (사령부가 있는) 도쿄로 건너가 직접 보고했죠.]

첩보의 양과 질도 월등했습니다.

[양욱/한국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 : 통계에 따르면 켈로 부대원들이 수집한 첩보는 한국전쟁에서 필요한 첩보 활동의 절반 이상을 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적진 한복판으로 투입된 요원이 살아 돌아온다는 건 기적에 가깝습니다.

[더글라스 딜라드/전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장교 : 얼마나 많은 수인지 모를 만큼 수많은 대원을 훈련시켜 북한에 침투시켰죠. 그들의 용기와 애국심이 존경스러웠습니다.전 결코 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앵커]

참 많은 분들이 전사하셨군요. 생존자는 얼마나 되나요?

[기자]

현재 생존자는 450명 정도입니다. 그중 여성 대원은 10명이 채 안 된다고 합니다.

[앵커]

중공군 참전을 사전에 알렸다면 정말 큰 공을 세운 분들인데, 정부가 충분한 예우를 해주고 있나요?

[기자]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켈로부대원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급여는 물론이고 훈장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대장을 지낸 일부 장교를 제외하면 모두 군번도, 계급도 없는 비정규군이었기 때문인데요.

취재 내용을 좀 더 보겠습니다.

+++

심용해 할머니는 불면증이 심합니다.

[심용해/6·25 당시 첩보원 : 그러니까 이렇게 많이 먹어야지 된다고…수면제, 이걸 정신과에서 가져온 거야.]

첩보원 시절의 불안감 때문에 찾아온 증상.

자신의 정보 때문에 숨져간 적군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심용해/6·25 당시 첩보원 : 옆에서 죽어가는 것, 남의 군인이야. 저쪽 사람들이지.
같은 사람이니까 친구잖아.]

이런 고통을 몰라주는 정부가 서운합니다.

[심용해/6·25 당시 첩보원 : 나라에 대해서는 내가 정말 많이 섭섭해요.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알아줘야지 되잖아.]

켈로부대원이 현재 받고 있는 수당은 월 15만원.

일반 참전용사와 같습니다.

[조경철/국가보훈처 등록관리과 : 국방부에서 관련 기록을 찾거나, 관련 기록이 없는 경우에는 그 당시에 같이 참전했던 전우를 찾아 심사해서 확인하고…]

적진 한복판에서 그 누구보다 위험한 작전을 해냈지만, 특수임무수행자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국군이 아닌 유엔군 소속이란 이유 때문입니다.

[김상기/KLO전우회 사무총장 : 우리 한국군도 당시엔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사실 싸운 것 아니예요? 그런데 (시행령에서) 유엔 및 외국군 소속의 첩보원 및 유격군은 본 법안에서 제외한다. 그렇게 못을 박아버린 거예요.]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라가 그들의 희생을 알아줄 희망이 생겼습니다.

관련법이 발의됐기 때문입니다.

[정문헌/새누리당 의원 : 전쟁통에 상세한 기록을 다 남기는 건 어찌보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우 보증 (전우의 증언)이나 기타 방법을 통해서 이 분들이 참전하셨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낼 수 있을 겁니다.]

군번도 없이 북한 땅 한복판에 던져졌다 살아돌아온 그들.

살아 생전 그 위험한 헌신을 인정받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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