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리던 가을비가 멈춘 화창한 24일(한국시간) 저녁, 토트넘 홈구장인 화이트하트 레인을 찾았다. 토트넘과 아스널의 캐피탈원컵 32강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리그경기도 아닌 컵경기 32강전이었지만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역에서부터 수많은 팬들이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더비 중 하나인 북런던 더비가 위엄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북런던 더비는 런던 북쪽 지역을 연고로 하는 토트넘과 아스널의 더비 경기를 일컫는다. 이 두팀의 악연의 시작은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잉글랜드 1부리그는 기존의 20개 팀에서 2팀을 더 늘리는 과정에 있었다. 그래서 강등예정이었던 19위 첼시는 잔류하고 2부리그 1, 2위와 함께 3, 4위 중 한 팀인 반슬리나 울버햄튼이 플레이오프로 승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2부리그 5위로 시즌을 마친 아스널 구단주 헨리 노리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풋볼리그 측은 1부 최하위팀과 아스널 중 한 팀을 투표를 통해 1부리그에 등록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투표에서 아스널이 승리해 1부리그로 승격하게 됐고 1부리그 20위 팀이 2부리그로 강등됐다. 희비가 엇갈린 이 강등팀이 바로 토트넘이다. 이 때부터 시작된 이들의 악연은 지금 현재까지도 줄기차게 유지되고 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도중 여러 토트넘 팬들을 만났다. 이들은 동양인인 나에게 ‘쏜(손흥민)’을 아느냐고 물어왔다. 그만큼 손흥민은 팬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특히 태어나면서부터 토트넘 팬이라 자칭하는 데이브라는 팬은 "나는 지난 크리스털 팰러스전부터 쏜의 팬이 되었다"며 "오늘 경기에서 꼭 승리하면 좋겠다"고 응원을 보냈다.
경기장을 향하면서 만난 것은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거리에는 수많은 경찰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다른 경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삼엄한 경비태세였다. 북런던 더비는 항상 이렇게 경찰이 많이 나와 있는 듯 했다.
올 시즌 처음으로 열리는 북런던 더비이기 때문일까. 경기장에 도착해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서자 평일 저녁임에도 빈자리 없이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작 전부터 양팀의 응원열기도 뜨거웠다.
예상대로 손흥민은 체력안배 차원에서 교체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1-1 접전이 이어지자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은 손흥민을 준비시켰고, 그가 몸을 풀기 시작하자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함성과 더불어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3경기만에 팀의 주전으로 자리매김한 손흥민의 입지와 팬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손흥민은 후반 24분 안드로스 타운젠트와 교체돼 그라운드에 들어섰다. 후반 추가시간을 포함해 약 25분 정도 경기에 나섰지만 그의 첫 번째 북런던 더비는 패배로 끝났다. 오랫만에 선발 출장한 마티유 플라미니의 멀티골로 아스널이 2-1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경기 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떠나고 모든 선수들이 퇴장한 후, 원정팀 응원 구역에서 아스널 팬들이 반유대적인 구호를 외치며 토트넘 응원 배너를 파손시켰다. 그동안 과열된 응원 열기로 인해 한 두명의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는 모습이나 일촉측발의 상황도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직접 기물을 파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믹스트존에서 시간을 보내고 꽤 늦은 시간에 경기장을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전철역으로 향하는 동안 양 팀 팬들의 고함소리가 계속 들렸고, 부상당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경찰이 데리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다행히 도로는 통제가 되어 있었고 경찰들이 사람들을 도로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아마 이제까지 경기장을 다니면서 영국에서 가장 많은 경찰을 본 게 아닐까 싶다.
북런던 더비의 열기를 몸소 체험한 소감은, 이전까지 직접 보지 못했던 광경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음보는 광경에 당황스럽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축구의 열기가 뜨거운 것은 좋지만 이렇게 비매너적인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북런던 더비는 오는 11월 8일(현지시간) 아스널 홈구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열린다. 과연 이 날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리고 팬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부디 그 날은 열정적인 응원과 매너있는 팬문화를 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