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는 1986년 11월 9일자 1면에 '日 81년 MVP 니시모도 교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니시모도'는 니시모토 다카시(59) 한화 투수 코치의 당시 표기다. 한화의 전신 격인 빙그레 이글스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던 거물 투수 니시모토를 영입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니시모토는 1981년 일본시리즈 MVP였다. 기사에는 니시모토가 '재일동포'라고 소개돼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83년부터 재일동포 선수에 문호를 개방했다. 선진 일본 야구에서 뛴 동포를 받아들여 프로야구 수준을 끌어올리자는 발상이었다. 30승 투수 장명부, 김시진과 함께 삼성 선발진의 쌍두마차였던 김일융 등이 재일동포 선수로 프로야구 초기 큰 족적을 남겼다.
이 기사는 "빙그레는 내년 중위권 내지 상위권 진입을 강력히 원하고 있는 구단주의 뜻에 따라 장훈씨를 통해 니시모토의 스카우트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며 "요미우리는 니시모토를 퍼시픽리그로 트레이드하려 했으나 불발돼 곤란한 처지"라고 서술했다. 일본 프로야구 3000안타 대기록의 주인공인 장훈은 당시 재일동포 선수의 모국 진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보도에 따른다면, 니시모토 코치는 29년 전 입을 뻔 했던 이글스 유니폼을 올해 와서야 입게 된 셈이다. 하지만 1986년 빙그레가 그를 영입하는 건 불가능했다. 니시모토는 '재일동포'가 아닌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KBO에는 외국인 선수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한국 이적이 성사되는 건 불가능했다.
니시모토 코치에게 29년 전 기사에 대해 물었다. 그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하리모토 이사오(장훈의 일본명) 선배와는 요미우리 팀 메이트로 지냈다. 하지만 하리모토 선배로부터 한국 야구 진출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흥미로운 얘기지만 나는 자이니치(재일)가 아니다"고 껄껄 웃었다.
당시 보도를 '오보'라고 단정짓기만은 어렵다. 빙그레가 니시모토 영입을 검토했던 것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빙그레 초대 단장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 노진호씨다. 노 전 단장은 1986년의 일을 묻는 질문에 잠깐 기억을 더듬더니 "당시 구단에서 니시모토를 스카우트 대상에 올렸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계약 조건을 제시했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일이 진전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노 전 단장은 "니시모토에 대해선 모두 장훈씨에게 일임했다. 장훈씨는 재일동포 선수 영입에 국내 구단이 나서는 걸 원치 않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한국 야구계에는 "니시모토가 재일동포 3, 4세"라는 이야기가 꽤 퍼져 있었다. 초대 KBO 사무총장이던 이용일 전 KBO 총재권한대행도 "니시모토가 한국계라는 이야기를 유력한 인사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 프로야구에는 많은 재일동포 선수들이 뛰었고, 지금도 뛰고 있다. 하지만 교포 사회에서도 누가 재일동포인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 많은 재일동포가 한국 핏줄임을 숨겼기 때문이다. 풍문에 의해 엉뚱한 인물이 한국계로 지목되기도 했다. 정보의 부족과 함께 일본 야구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도 작용했다.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자는 한재우 전 재일교포 고교 야구팀 감독이다. 간사이 지역이 주 활동 무대였던 한 전 감독은 1960년대부터 교포 야구단의 모국 방문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위해 일본 내 각급 기관으로부터 재일동포 선수에 대한 자료를 받은 인물이다. 한 전 감독은 21일 국제전화를 통해 "니시모토는 일본인이다. 재일동포가 아니다"고 단언했다.
1986년 니시모토 코치는 이글스 유니폼을 입을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런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주어를 바꾼다면, 한화가 29년 만에 니시모토를 선수가 아닌 투수코치로 유니폼을 입힌 건 사실이다. 묘하다면 묘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