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긱이 야구 마니아 여러분의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는 까다롭습니다. 평소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자주해 긱(GEEK, 괴짜)이라 손가락질 받던 여러분! 세상 누구도 묻지 않았던, 살아있는 질문만 받습니다. 엄격한 질문 선별 과정을 거쳐 긱(GEEK)의 시각에서 진지하게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베이스볼긱은 일간스포츠가 만든 최초의 모바일 야구신문입니다.
Q. 야구 경기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김태균 선수의 헬멧은 유독 새까만 거 같아요. 한화 로고 'E'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러워요. 연봉도 많이 받는 선수가 헬멧 값이 아까워 헌 것을 쓰는 건 아닐 아녜요. 더러운 헬멧을 쓰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성산동에서 김방돈)
A.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타이거 스틱' 때문입니다. 김태균 선수를 포함해 헬멧이 더러운 타자들은 타이거 스틱을 헬멧에 바르기 때문입니다. 아마 타이거 스틱이란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분도 계실 텐데요, 쉽게 말하면 타자들이 사용하는 미끄럼 방지용 배팅그립(송진액)입니다. '끈끈이'라고도 불리는 배팅그립은 파라핀 성분이 들어가 방망이를 잡았을 때 미끄럼 방지를 도와줍니다. 정식명칭은 핸드그립스틱인데 미국산 '타이거 스틱'제품이 대명사로 굳어지면서 송진액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입니다. 송진액이 갈색을 띠기 때문에 이걸 헬멧에 문지르면 금세 낡은 것처럼 더러워집니다.
헬멧이 더러워진 이유는 알겠는데, 김태균 선수가 배팅미끄럼 방지용 그립을 배트가 아닌 헬멧에 바르는 이유가 뭐냐고 의아해 하실 겁니다. 이와 관련해 팬들의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김태균 선수가 일본리그로 진출(2010년)하기 전 성적이 좋을 때 썼던 헬멧을 사용한다는 의견, 송진액을 헬멧에 바르고 타석에 서면 성적이 좋다는 징크스 때문일 거라는 추측, 두상이 커서 새 헬멧을 사용하기 위해선 전용으로 맞춰야 하는데 귀찮아서 헌 것 사용, 빈티지 패션 스타일을 표현하기 위해서 등 설이 많습니다. 최근 롯데로 이적한 최준석의 헬멧도 유독 더러운 것을 발견한 일부 팬들은 '맞춤 제작 헬멧설'에 무게를 두기도 했습니다. 모두 재미있는 추측이지만 아쉽게도 정답은 아닙니다.
이번에도 정답부터 알려드리면 김태균 선수가 송진액을 헬멧에 묻히는 이유는 방망이가 미끌리지 않고 착 달라붙도록 최적의 손바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타자들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 끈끈이를 바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손에서 땀이 나와 발라뒀던 송진액의 효과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석에 섰는데, 송진액을 바르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헬멧에 미리 송진액을 발라뒀다가 타석에 섰을 때 송진액이 필요하면 손을 뻗어 헬멧에 묻은 송진액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헬멧에 미리 송진액을 발라뒀을 때의 이점은 이 뿐이 아닙니다. 송진액을 헬멧에 충분히 발라두면 대기타석에서 송진액을 바르는 시간을 아끼고 상대팀 투수의 투구를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빛바랜 헬멧' 사용으로 유명한 메이저리그 전설적인 타자 크레이그 비지오는 "대기타석에서 방망이에 그립스틱을 바르거나 스프레이를 뿌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상대투수가 앞선 타자를 상대로 어떻게 승부를 하는 지 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헬멧에 미리 발라놓은 그립스틱을 손에 묻히면서 상대투구를 관찰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타자들이 헬멧에 송진액을 묻히는 것은 타격 완성도를 높이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한 자신들만의 노하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송진액 이야기가 나온 김에 메이저리그 역사상 파인타르(송진액의 영어식 표현, Pine Tar)와 관련된 유명한 사건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1983년 7월 24일 캔자스시티 로열스 대 뉴욕 양키스의 아메리칸리그 경기에서 이른바 '조지 브렛의 파인타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4로 뒤져 있는 9회초 2사 1루에서 캔자스시티 강타자 조지 브렛이 양키스 마무리투수 리치 고시지를 상대로 우월 역전 2점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런데 양키스의 빌리 마틴 감독이 팀 맥클랜드 주심에게 브렛의 방망이에 지나치게 송진이 많이 묻었다며 항의를 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야구규정 1조 10항에는 "방망이에 이물질이 17인치(43.18cm) 이상 묻으면 안 된다"고 명시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맥클랜드 심판은 브렛에게 다가가 방망이를 보여 달라고 했고, 홈플레이트에 올려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맥클랜드 주심은 규정의 적용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가로 길이가 17인치인 홈플레이트를 잣대로 활용한 것입니다. 확인 결과, 브렛의 방망이에는 파인타르가 20인치 가량 묻어 있었습니다. 결국 맥클랜드 주심은 덕아웃에 있던 브렛에게 뒤늦게 아웃을 선언하고 2점 홈런은 무효처리 되었습니다. 그 날 경기에서 로열스는 양키스에 4대 3으로 졌습니다.
그런게 경기가 끝난 후 로열스 팀은 주심의 판정에 대해 제소했고, 아메리칸리그 리그 회장은 로열스 편을 들어줬습니다. 그래서 로열스는 한 달 만에 9회 초 2사부터 공격을 시작해 5-4로 승리했습니다. 열받은 뉴욕 양키스의 빌리 마틴 감독은 재개된 경기에서 왼손 1루수 돈 매팅리를 2루수로 기용하는 등 불만을 공개적으로 나타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문제의 파인타르 배트는 현재 명예의 전당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메이저리그 야구 규칙은 이 사건을 계기로 몇 가지 개정 되었습니다. 방망이에 묻을 수 있는 이물질의 허용 범위가 17인치에서 18인치로 바뀌었고, "심판원은 타자가 사용한 공인 배트가 본 규정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타격 중 또는 타격 종료 이후에 발견하더라도 타자에게 아웃을 선고할 수 없다"는 단서가 해당항목에 추가되었습니다.
타르와 배트에 관해 한국 프로야구 규약을 찾아봤습니다. 메이저리그와 차이점이 없었습니다. 헬멧에 관한 규정에는 타르와 관련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